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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아침]'264(이육사)'

최종수정 2015.01.30 09:54 기사입력 2015.01.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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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막내 동생 원창의 손에는 한 줌 재로 변해버린 형의 유해가 들려 있었습니다. 원창은 억울하고 막막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국 땅 차가운 감옥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두려움과 외로움에 몸서리 쳤을 형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1944년 오늘 새벽 5시. 이육사는 북경의 감옥에서 그렇게 죽었습니다. 반년 전 어머니 소상(小祥)에 고향엘 갔다가 일경에 붙잡혀 이곳 북경으로 왔습니다. 1년만 더 견뎠으면 꿈에 그리던 해방을 보았을 텐데. 몇 달만 더 견뎠으면 나이 40이라도 채웠을 텐데.

이육사(이원록)는 1904년 안동에서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한테서 한학을 배웠고 17세에 대구로 이사해 교남학교(현 대륜고)를 나왔습니다. 1923년 일본으로 가 1년여 동안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다 1925년 귀국합니다.

이 때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의 주요기관을 파괴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윤세주의 의열 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이육사는 형 원기와 동생 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합니다.

그러던 중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무차별 검거에 나섭니다. 이육사는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습니다. 이때 수감번호가 '264' 번이었습니다. 진범을 잡지 못해 초조해진 일경은 육사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육사를 폭탄 운반자로,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가했습니다.
결국 일본 오사카에서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자 2년 4개월여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 때의 고문 후유증은 평생 육사를 괴롭힙니다. 그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 리스트에 올라 걸핏하면 예비 검속에 걸려 고초를 겪었고 40도 안되는 일생에 무려 열일곱 차례나 옥고를 치릅니다.

1932년 10월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 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에 입교해 6개월간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습니다. 수료 후 비밀 임무를 띠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34년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가 없어 풀려납니다.

이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육사는 문학으로 항일을 하기로 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합니다. '절정', '광야', '청포도' 등과 같은 30 여 편의 시와 정치 사회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씁니다.
그는 몸으로, 입으로 함께 항일 투쟁을 벌인 진정한 독립투사였습니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itbri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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