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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2]유배 순교자 기념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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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센 강에는 작은 섬들이 몇 개 있습니다. 시테 섬이 그중 대표적이죠. 크기는 여의도보다 훨씬 작지만 지리와 역사의 측면에서 중요한 곳입니다. 겔트족의 지파인 파리시족이 기원 전 1세기경에 이 섬에 정착하면서 촌락을 이루기 시작, 오늘날과 같은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하니 파리의 발원지이자 중심지로 불러도 좋겠습니다. 프랑스 고딕 건축의 대표적 명소인 노트르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가 일품인 생 샤펠 성당, 그리고 프랑스 거리 측정의 기준점인 포인트 제로도 이 섬에 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 바로 앞이죠. 작은 원 바깥에 팔방형의 삼각뿔이 있고 그 외곽에 다시 큰 원이 있는데, 거기 ‘프랑스 길의 중심점’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프랑스의 중심이자 파리의 씨방 같은 이곳 시테 섬에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은밀한 공간이 숨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국외로 추방되어 나치 수용소에서 희생된 프랑스 시민들의 넋을 기리는 공동묘지입니다. 정식 명칭은 유배 순교자 기념물(Memorial des Maetyrs de la Deportation)인데 직접 가서 보니 ‘유배 순교자 기념소’가 더 어울립니다. 이 메모리얼은 고통을 잊지 않으려는 ‘기념 건축’이긴 하지만 분명 하나의 공간이자 장소로 느껴지니까요.

시테 섬을 두어 번 왔지만 오늘은 유난히 시끌벅적합니다. 대성당 입구에서 바자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교실 서너 개를 합쳐놓은 듯한 커다란 텐트 안에 맛있는 빵들이 가득하네요. 사람도 가득하고, 온갖 풍미도 가득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볼 수 있습니다. 오감이 모두 만나는 곳. 생의 활기가 가득합니다.


성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집니다. 나지막하고 기다란 철제 담이 울타리처럼 늘어 서 있습니다. 그 사이, 좁은 문이 있는 듯 없는 듯 살짝 열려 있네요. 아래쪽으로 가파른 계단이 나 있습니다. 양쪽은 콘크리트 벽입니다. 거칠고 높고 답답합니다. 센 강을 비롯한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은 점점 가라앉습니다. 열린 외부가 아니라 닫힌 외부네요. 5m 높이의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인 수용소 느낌입니다.


아래쪽 마당에 이르면 기념소 입구로 들어가는 돌문이 보입니다. 직육면체의 거대한 콘크리트 두 덩이가 버티고 있죠. 그 사이로 한 사람 겨우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건축가인 조르쥬-앙리 팡귀송(Georges-Henri Pingusson)은 지하를 파서 비우는 방식으로 이 기념 공간을 만듭니다. 어두컴컴한 곳. 폐쇄된 곳. 울음을 씹어 삼키는 곳.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실감할 수 있을지 오래 고민하게 하는 여기는 현대판 크립트! 1962년 4월 12일 개관 당시에, 전쟁 생존자 단체인 ‘기억의 네트워크(Reseau de souvenir)’가 이 기념관을 과거 교회 묘지로 쓰던 지하실을 지칭하는 ‘크립트(crypt)’라 묘사한 게 실감납니다.

실내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엄숙합니다. 질식할 듯한 침묵이 발걸음을 내내 따라다니죠. 안내판을 보니 사진을 찍지 말랍니다. 중요한 기록들이 도표로 드러나 있는데 메모를 할밖에 없네요. 프랑스에서 유럽 전역의 나치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어지러운 화살표들이 난기류처럼 여기저기로 뻗어 있습니다. 7만5000명, 6만3500명, 8300명…. 한 번에 보내져서 희생된 이들의 숫자입니다. 모두 20만 명이 수용소로 갔다는군요.


어둠을 따라 다른 층으로 가니 홀연 밝은 불빛이 보입니다. 기다란 통로 양 옆에 밤하늘의 은하처럼 밝은 빛들이 있네요. 수용소에서 희생된 16만 프랑스 시민들의 이름이군요. 쇠창살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순 없습니다. 이 불빛들은 수용소에 갇힌 영혼의 별들이 아닐까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자 잊을 수 없는 이름들 말이죠. 통로의 먼 끝에 식은 태양처럼 작고 둥근 빛이 빛나고 있습니다. 별들은, 영혼들은, 겨우 견디고 있는 것이죠.


죽은 이들을 위한 추모 디자인은 이처럼 우주적이고 철학적입니다. 5분 거리의 바깥세상은 사람들로 흥성거립니다. 하지만 이 별들은 하늘을 만져볼 수도 없고 서로를 껴안을 수도 없지요. 검고 긴 통로 속에 묻혀 있는 영혼들은 우리 마음속에서만 별입니다. 건축가는 추방된 영혼들을 방문자의 마음속에 초대하기 위해 공간을 특별하게 디자인합니다. 감각의 발견! 누구든, 언어를 초월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감각일까요? 아니면 심층무의식일까요? 영혼의 별들은 어두운 시간의 터널을 지나 지금 내게 다가옵니다. 서럽고 안타까운 목숨의 파도들이 내 가슴의 해변에 밀리어 오는 겁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햇빛 밝은 거리에 나가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빛을 나누는 일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과도 함께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도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내 삶인 겁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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