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보통 17~18세기 해적이라고 하면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럽 출신 해적들이 유명하지만, 동아시아에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콕싱가(Koxinga)'란 이름의 해적이 있다. 그의 본명은 정성공(鄭成功)으로 중국과 일본, 대만에서 모두 해상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인물이다. 콕싱가는 그가 명나라 황제에게서 황가의 성씨인 주(朱)씨를 하사받은 후 '국성야(國姓爺)'라 불렸던 별칭이 서양에 전해져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정지룡은 이내 본국으로 돌아가 새 살림을 차렸고, 정성공은 어머니 밑에서 7살까지 자라나다가 아버지 정지룡의 부름을 받고 1629년 푸젠성으로 이주, 중국식 교육을 받게 된다. 아버지 정지룡은 최대한 자신을 명나라의 충신이자 수군제독의 이미지로 아들에게 남고자 노력했고, 이것이 정성공의 일생일대 목표가 된 '반청복명'의 기치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성공이 활약하던 시절 중국 남부 일대 지도 모습. 이 지역은 16세기 이후 일본 출신 왜구, 포르투칼과 네덜란드, 스페인 상선, 중국인 해적과 상인 등이 뒤얽혀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정성공의 해상세력은 성장해나갔다.(사진=위키피디아)
원본보기 아이콘이에 정성공은 1661년 남은 병력을 추슬러 당시 네덜란드 상관이 점거한 상태였던 대만으로 들어간다. 네덜란드인들은 정성공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학살되거나 노비가 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서양에서 악명높은 해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이후 정성공은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 총독부와도 알력을 벌이다가 1662년 대대적인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의 망명정부였던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가 미얀마에서 청군에 사로잡혀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병사하고 말았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대만에 설치했던 질란디아 요새 모습. 정성공의 대만 침공으로 1662년 요새가 함락되면서 네덜란드의 대만지배는 끝나게 된다.(사진=위키피디아)
원본보기 아이콘그의 활약 속에서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사는 상당히 큰 변화를 겪게된다. 청나라는 대만을 고립시키기 위해 바다로는 나무조각 하나 띄울 수 없다는 강경한 해금(海禁)정책을 펴게됐으며, 이것은 명대 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중국의 해상무역을 크게 후퇴시키고 대운하를 중심으로 한 내륙운송 무역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한편 그의 해적활동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은 포르투칼은 일본과의 교역 루트를 접게 됐고, 이로인해 네덜란드인들이 일본 무역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성공 사망 이후부터 그의 해상세력은 갈 길을 잃기 시작했다. 잠시 청나라에 투항한 장수였던 오삼계가 일으킨 삼번의 난 때 오삼계 세력에 합류하며 푸젠성 공격에 나서기도 했으나 청군에 참패, 결국 1683년 청군에 의해 대만이 함락되면서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현대 중국에서는 나라를 위해 끝내 충절을 지킨 충성스런 장수의 이미지로 남아 영웅으로 추도되고 있으며, 대만에서도 네덜란드인을 내쫓고 대만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 추대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1895년 대만을 식민지를 삼은 이후부터 나가사키의 중요한 인물로 다루기도 했다. 그가 나가사키 태생이고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자랐다는 부분을 강조해 대만을 처음 정복한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선전시키기도 했다. 중국, 일본, 대만 삼국에서 각자 다른 이유로 영웅으로 추대하긴 했지만, 그의 일대기는 17세기 동아시아 해상무역사의 면면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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