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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형의 오독오독] '키스 딜레마'에 빠진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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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사랑의 예술사' - 미술작품으로 본 시대에 비친 여성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The Kiss)'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The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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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현대 총8장으로 구성, 그리스 신화부터 여성혐오 흔적
중세 유럽에선 성녀, 악녀 이분법 … 바로크시대 '19금' 유행

[아시아경제 이근형 기자]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이었을 거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홀로 있음을 확인하고 뒤져보던 책이 있었다. 세계 명화들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그 책을 펼친 이유는 단 하나. '여체의 신비'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상용화 되지 않던 시절이 더 정확한 표현이지만) 자라나는 새싹의 호기심을 채워줄 스승은 책밖에 없었고 그중에서도 여성의 나체를 그림으로나마 목격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그 책들뿐이었다. 그 그림들의 작품명이 무엇인지 그때도 모르고 지금도 모른다. 어떤 그림인지가 중요했던 게 아니었으므로.
성인이 된 후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그 이유로 더 이상 그림이 필요치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림과는 멀리 지냈다. 그러던 중 지적 호기심이라고 쓰고 지적 허영심이라고 읽는 그 감정으로 책을 집었다. 이미혜가 쓴 '사랑의 예술사'다.

이 책은 사랑을 주제로 하는 미술 작품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예술의 역사를 여섯 부분으로 나눠 기술했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근대2, 현대2로 총 8부로 구성했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사랑을 주제로 함을 선언하고 있지만 더 좁혀보면 역사가 여성을 어떻게 봐왔는지, 더 정확하게는 여성을 어떻게 소비해왔는지가 주 내용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 신화는 납치와 겁탈이 일상적인 세계다. 바람기라고 설명하고 넘어가 버리는 제우스의 행동들이 그렇다. 이 지점이 고대 그리스 시대상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여성은 소유물일 뿐이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은 여성은 아이를 낳기 위한 수단일 뿐 진정한 사랑은 동성끼리만 나눌 수 있다고 여겼다.
시대에 비친 여성은 악녀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아손의 황금양털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인 메데이아가 친자식을 살해한 내용이 소포클레스의 '에우리피데스' 등장 이전 구술로 전해지던 시절엔 없었다며 이를 당대에 만연한 여성 혐오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물론 당시의 문화를 현재의 틀로 판단할 수 있는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중세 유럽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이때 여성의 상징은 남성을 유혹해 선악과를 먹게 했다는 이브다. 성모 마리아 숭배가 시작되면서 여성은 성녀와 창녀 같은 이분법적인 구분에 놓이게 됐다. 성녀의 이미지조차도 성모 마리아가 출산을 했음에도 처녀성을 지킨 것으로 공식화할 정도로 여성성을 제거한 신성의 영역이었기에 여성의 지위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계몽사상가 테레즈' 같은, 현재로 치면 '19금 소설'에 해당되는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퇴폐 문학의 끝판왕 사드 후작이 이때 등장했다. 저자는 사드 이후 창녀가 해설자로 등장하여 그나마 여성적 요소가 있던 작품들이 사라지고 육체를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 소비하는 작품들만 남게 됐다고 지적한다. 현재의 포르노 사업처럼 철저한 쾌락의 돈벌이가 된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서 낭만적 사랑이 유행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처럼 결혼은 가문 간의 계약이 아니라 사랑을 바탕으로 한 당사자 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중산층의 이데올로기가 작품에 반영됐다. 하지만 이 시절의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제약이 있었다.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진 로테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어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그러했다.

가정을 이룬 여성은 자애롭고 희생적인 어머니여야만 했다. 이 무렵 회화는 가정을 예찬하는 작품이 많았는데 규정된 여성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했다. 19세기가 돼서야 계층변화와 높아진 여성의 교육 수준으로 정숙한 여성의 신화에 균열이 생겼다. 뭉크의 '창문 옆의 키스', 클림트의 '키스'와 같이 남녀의 애정 행각을 다룬 작품들이 등장했다. 당시 여성들이 겪었던, 키스를 잘하면 의심받고 못하면 실망감을 주는 딜레마는 변화하는 시대와 아직 남아 있는 전통 사이의 혼란을 말해준다. 이렇게 작게나마 여성들의 해방이 가능해지자 등장했던 반작용이 세기말 '팜므파탈'의 유행이다.

성녀와 창녀, 악녀를 오가던 여성성은 현대에 이르러 경제적 능력 증대와 페미니즘의 등장 등으로 상당한 해방을 성취했다. 여성의 성욕도 권리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강화된 여성의 권리로 가부장제가 해체되면서 그전에는 금기시됐던 게이와 레즈비언 작품들도 등장하게 됐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여성성의 신화와 낭만적 사랑의 서사가 해체된 건 아니었다. 소설로 시작돼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레이의 50가지 비밀'은 부잣집 남자에게 평범한 여성이 선택을 받는 낭만적 판타지와 퇴폐적 성적욕망을 버무려 큰 인기를 끌었다.

저자는 전설ㆍ역사적 사실과 작품을 연결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도하면서도 이해하기 쉽도록 책을 구성했다. 더 많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저자의 노력 덕분에 어렵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쉽게 펼치지 못하는 예술서적을 술술 읽을 수 있었다. 본래 정해둔 주제는 '사랑'과 '예술로 소비되는 여성'이었다고 하는데, 저자가 목표를 충분히 실현했는지는 모르겠다. 저자는 서문에 "원고에 마침표를 찍고 나니 페미니즘의 관점을 좀 더 분명히 드러냈어야 하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는다"고 적었다.
종합편집부 기자 ghlee@

사랑의 예술사 / 이미혜 / 경북대학교출판부 / 2만9000원




이근형 기자 gh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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