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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도시이야기]물류·군사 요충..미군떠난 자리 新龍의 부활

최종수정 2017.07.14 17:08 기사입력 2017.07.14 17:08

일제시대 日조선군 본부 등 주둔
고려 숙종 때 남경 후보지로 거론


1966년 촬영한 용산구 이촌동 일대 판잣집 전경<자료제공:서울시>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서울 한복판 용산은 예로부터 무(武)의 기운이 서린 지역이다. 일제시대 일본 조선군 본부가 1910년부터 광복 전까지 있었고 그 후에는 잠깐을 제외하고 쭉 미군이 주둔했다. 미군의 평택이전이 결정되자 '100년만의 반환'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사실 19세기 후반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갑신정변 후엔 일본군이 머물렀고 이보다 한참 앞서 임진왜란이나 고려 말 몽골군의 침략 때도 병참기지로 쓰였다. 군기가 센 지역이 된 건 지극히 현실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한강의 포구 가운데 수심이 깊은 축에 속한 데다 한양도성과도 가까워 바다에서도 배가 드나들기 적합한 요지로 꼽혔다. 강을 끼고 있어 퇴로확보에도 유리했다. 평시에는 교통과 물류의 집산지, 전시에는 군사 요충지로 각광받은 셈이다. 주한일본공사는 1883년 구 용산 일대를 개시장(조선 후기 대외무역시장)으로 개방했다. 돈과 무기가 몰리니 사람까지 모여드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최초의 근대식 교량으로 꼽히는 한강철교와 첫 도로교량인 한강대교가 용산에 있는 것도 괜한 게 아니다.

용산(龍山)은 이름 그대로 산세가 용과 비슷하다는 데서 따온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 백제 시대 한강에서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 한성에 속했다가 일제 때 경기도로 편입됐다. 이후 광복 이듬해 서울시 용산구로 지정됐다. 고려 숙종 때 남경 후보지로 거론된 적도 있으나 실현되진 않았다. 지금의 사대문 안 한양도성 일대와 풍수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평가를 받았단 얘기다.
용산은 근래 들어 다시 개발이슈로 주목받고 있다. 미군이 떠나고 남은 터에 들어서는 용산공원은 첫 국가공원이다.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의 경우 도심 대규모 공원이 주거선호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용산공원 주변의 아파트촌이나 재개발지역 집값엔 이미 이 같은 기대감이 반영돼 있다.

옛 단국대 부지에 들어선 한남더힐은 국내 아파트 중 가장 비싼 곳이다. 한강과 맞닿은 이촌동 일대나 한남 일대 뉴타운 집값도 강남 못지않게 올랐다. 단군 이래 최대 개발사업으로 꼽힌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은 좌초했으나 여전히 용산 지역에 대한 개발 기대감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서울시는 서울역과 용산ㆍ이촌역을 아우르는 용산 일대 개발 종합계획(마스터플랜)을 새롭게 짜고 있다.

용산이 서울 강남 지역 못지않게 부동산 투자자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우리 안에 숨겨진 욕망의 추악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줬던 용산참사의 현장을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 가까이 지나 살아남은 유족은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고 인근 재개발구역은 멋들어진 아파트로 속속 변하고 있다. 당시의 사태를 부채질한 이익추구 열망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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