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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지평선 밑에 숨겨 둔 소년 1/신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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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가루 날리는 길거리 식당에서
 호쇼르와 부즈를 놓고 망설이는데
 시끄럽게 왕파리가 날아다녔다.
 부즈는 어떠냐고, 금방 나왔다고
 청년이 수줍게 말했다.
 낯익었다.
 나무란 나무는
 꼭대기까지 다 올라가 보던 소년,
 영하 35도, 맨홀 속으로 들어가
 온수 파이프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마른 빵을 잘라 먹던 소년,
 한국에 가고 싶다고 언제 돌아가냐고 묻던 소년,
 맨홀 뚜껑을 쾅 하고 닫던 떠돌이 소년,
 몽골을 떠난 뒤에도 꿈속까지 흔들던 그 울림.

 나는 통역한테 저 청년 여기 사람이냐고,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말 잘해요, 직접 얘기해 보세요' 하고 통역은 자리를 피했다. 청년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차가 지날 때마다 흙먼지가 창을 뿌옇게 덮었다. 보기만 해도 목이 메었다. 옛 기억을 다 덮어 버린 것일까?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서둘러 어두워진 시간을 빠져나왔다. 황야, 지평선이 머리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인이 적어 둔 각주에 따르자면 '호쇼르'와 '부즈'는 몽골의 전통 음식으로 각각 튀김만두와 찐만두라고 한다. 시인은 지금 "흙가루 날리는 길거리 식당에서" 만두를 파는 어떤 몽골 청년 앞에 서 있는데, 그 몽골 청년을 "어디서 본 것"만 같다고 한다. 어디였을까? 내 추측은 이렇다. 아마도 시인은 오래전에 몽골에서 한 소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소년은 "나무란 나무는" "꼭대기까지 다 올라가 보던 소년"이었고, 맨홀 속에서 "마른 빵을 잘라 먹던 소년"이었고, 시인에게 "한국에 가고 싶다고 언제 돌아가냐고 묻던 소년"이었다. 즉 2연에 등장하는 "떠돌이 소년"이 바로 만두를 팔고 있는 몽골 청년이었던 것이다. "옛 기억을 다 덮어 버린 것일까?" 도대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만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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