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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기다린 복수, 참 덧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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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논란 고선웅의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다시 무대로

몰살된 가문의 마지막 남은 핏줄 '조씨고아'
그 핏줄을 위해 자식과 아내까지 잃은 남자
원수의 양아들로 살다 알게 된 진실과 복수
하지만 그 끝은 공허함
무대 끝 흰 나비의 비상
인생의미 되새기게 만들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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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 소리에 맞춰 놀다보니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면 어느새 늙었네.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무대는 반원형. 단출하다. 붉은 장막을 드리웠는데 길이는 7m다. 공간을 비극의 무게로 메웠다. 검은 부채를 든 묵자(墨者)가 그 공간을 사뿐히 가로지른다. 그러다 불현듯 시선을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향한다. 20년 동안 깊이 잠든 복수의 음모와 그 허망한 끝이 무대 위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듯이. 죽은 이는 정치권력과 야욕, 명분이 뒤범벅된 세상에서 꼭두각시가 아닌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희생을 대가로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놀란 관객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 공중을 훨훨 나는 하얀 나비를 보며 또다시 '삶'을 되새기는 경험은 작품이 보여주는 역설이요 크나큰 선물이다.

중국 진나라 시대. 무인 도안고는 왕의 총애를 받는 문인 조순을 시기하고 권력에 눈이 멀어 그에게 반란죄를 씌운다. 조순의 가문 300여명을 몰살하라는 명이 내려지고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만 살아남는다. 한때 조순 집안의 문객이었던 정영은 자기 아이와 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조순의 손자 조씨고아를 살려낸다. 조씨고아는 정영의 슬하에서 정발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한다. 이 사실을 모르는 도안고는 정영을 자기편으로 믿고 정발을 양아들로 삼아 뛰어난 무인으로 훈련시킨다. 어느덧 20년이 흘러 정발이 장성하자 정영은 참혹했던 지난 일을 고백하며 양아버지 도안고에 대한 복수를 당부한다.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선 정발은 20년 전 죽임을 당한 친아버지 조삭과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정영, 그리고 양아버지인 도안고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복수를 택한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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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감독 고선웅(49)이 각색과 연출을 맡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작가 기군상의 '조씨고아'가 원작이다. 중국 4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2015년 국내에서 초연해 52회 동아연극상, 대한민국연극대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해 10월엔 중국 무대에도 올라 현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지난 18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새롭게 개막해 2월 12일에 끝나는 이번 공연에는 고 감독을 비롯, 2015년 연극계의 주요 시상식을 휩쓴 초연 출연진이 대거 합류했다. 장두이(도안고), 하성광(정영), 이형훈(조씨고아) 등이다. 공손저구 역은 고 임홍식 대신 정진각이 맡았다. 두 시간에 걸친 연극은 배우들의 열연과 속도감 있는 대사, 빠른 이야기 전개로 숨 가쁘게 흘러간다.
고선웅의 연출은 권선징악이라는 주제, 흔하디흔한 복수극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변증법적 드라마로 수용했다. 무대는 어둡고 무겁다가 어느 순간 희극처럼 가벼워지고 또다시 씁쓸한 애잔함으로 충만하다. 길지만 분명한 대사,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인물들이 온몸으로 뿜어내는 절절한 에너지는 관객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식을 희생시켜야 하는 운명을 마주한 사나이 정영, 핏기어린 눈빛으로 오열하는 정영의 처가 된다. 그리고 슬픔을 넘어 마비의 순간이 찾아온다.

고 감독은 원작에 없는 인물인 정영의 처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조씨고아를 살려야만 하는 그녀의 기구한 처지를 강조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가 낳은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과 싸우는 처절한 몸부림에서 비극은 절정을 맞는다. 조씨고아를 살리겠다는 약속 하나. 그 명분을 지키고자 마흔다섯 살에 어렵게 얻은 친자식과 자식을 좇아 아이의 무덤가에서 자결한 아내의 뒷모습을 보는 정영. 그렇게 20년을 흘려보낸 정영의 공허한 뒷모습. 관객들은 이때부터 눈시울을 붉힌다. 배우 하성광이 "평생 경험할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가르쳐준 작품"이라고 했듯 정영은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고뇌로 일그러진 얼굴로 심리변화를 표현한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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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문의 원수를 갚은 조씨고아는 복수를 마쳤다며 기뻐한다. 하지만 복수만을 위해 20년을 기다린 정영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이 모든 악의 씨앗인 도안고, 그의 가문을 절멸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지만 20년 세월이 허망하게 흘렀을 뿐 그에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아들의 배반에도 헛헛하게 웃는 도안고의 얼굴에서도 악(惡)이 느껴지질 않는다. '복수가 뭐라고 그 장구한 세월을 그냥 흘려보냈냐'고 비웃는 그에게서 슬픔이 묻어난다. 20년을 기다린 복수, 그 뒤에 남은 끝 모를 공허. 선과 악, 기쁨과 절망의 경계도 무너진다.

줄거리와 상관없이 무대에 올라 등장인물의 죽음이나 장면의 전환을 알리는 묵자의 독백과 흰 나비의 비상으로 연극은 끝난다. 나비는 일장춘몽의 덧없음과 더불어 인생의 즐거운 나날과 기쁨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개 필부 정영의 희로애락처럼 결국 다 흘러가고 잊히고 덧없다. 살뜰한 말투로 부디 좋게 살다 가기를 바란다는 묵자의 외침은 자리를 뜨려는 관객에게 '지금 이 순간, 또 무엇을 좇을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실로 무거운 당부이다.

한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은 연출가 고선웅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빠졌다는 사실이 지난 9일 국회 최순실 국조특위 7차 청문회를 통해 알려지면서 거듭 화제가 됐다. 고 감독은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푸르른 날에'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하지만 2015년 고 감독과 국립극단이 협업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본 박민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작품성을 인정해 그를 블랙리스트에서 제외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고 감독은 "'푸르른 날에'는 블랙리스트에 오를 만한 작품이 전혀 아니다. 작품에서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주장을 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했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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