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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회의(會議)비에 대한 회의(懷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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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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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공동연구과제를 진행할 때 깜짝 놀란 일이 있다. 한 연구원이 대뜸 "연구가 곧 종료되는데 연구비가 좀 남았으니 패밀리 레스토랑 상품권을 사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연구비랑 레스토랑 상품권이 무슨 상관인지 영문을 몰랐는데 회의비를 식당에 예치(?)하는 것이었다. 그런 관행을 처음 접한지라 놀라기도 했고 또 나랏돈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연구비 집행의 허점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던 나도 지난 몇 년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회의비를 본래 취지와 다르게 사용하는 데 둔감해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직장 문화에서 회의비의 부정 또는 부적절한 집행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모럴 해저드만으로 돌릴 수 없는 구조적인 현상이라는 확신이 굳어져갔다.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어 언제부터인가 내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애매한 경우에는 그냥 내 개인 카드로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먼저 회의비 액수가 줄었다. 내 돈인데 식당이나 메뉴를 아무렇게나 고를 수는 없는 것이다. 회의 횟수도 줄어들었다. 웬만하면 근무 시간에 짧고 굵은 회의를 하니 회의의 '질'이 높아졌다. 이처럼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지만 댓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짠순이 기질이 심한 내가 '진짜 짠순이'라는 좋지 않은 평판이 생긴 것이다. 또 낮에만 회의를 하니 저녁에 학생이나 다른 교수들과 어울려 평소 꺼내기 어려운 학문적 고민과 정다운 학교생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줄어들었다.

작년에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에서 연구 회의비 집행 규정 개선에 관해 약 1000명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가 있다. 국내 연구 문화상 국가연구과제의 연구 회의비 항목이 필요하다는 데에 84%라는 절대 다수가 동의했다. 또 연구 회의비 항목을 없앨 경우 연구자들이 회의비를 개인 경비로 처리해야 함에 따라 연구참여자의 경제적 부담이 증가할 것이라는 응답자가 47%였다. 예전 회의비로 집행했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또 다른 연구비 부정행위가 발생할 것이라는 의견에도 33%가 동의했다.

재미있는 것은 연구 회의비 항목이 왜 필요 또는 불필요한지 연구자들이 주관식으로 답한 내용이다. 약 100쪽의 보고서에 무려 80쪽이 주관식 의견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만큼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필요한 이유로는 위계적인 한국 문화에서 그나마 식사를 통해 수평적 관계로 연구를 논할 수 있다는 점, 연구가 점점 거대ㆍ융합화되면서 공동연구자 사이의 회의 필요성이 늘고 있다는 점, 밤낮 없는 장시간 연구 체제에서 근무시간 외 식대 지출의 불가피성, 연구실ㆍ실험실 외 비공식적인 대화에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아이디어 교류가 활발해진다는 점 등이다.
불필요한 이유로는 잦은 회의로 인한 연구 능률 저하, 남성 중심의 접대 문화에서 비롯된 회식에서 생산적인 얘기가 오가기 어렵다는 점, 연구자 개인의 외식비 전용 등을 들었다.

이처럼 회의비의 필요성에 대한 찬반 의견이 팽팽한 것은 회의비 오남용이 전적으로 연구자 개인의 윤리 문제도 아니고, 연구 환경 탓만도 아님을 반증한다. 최근 다르파 로봇챌린지에서 우승한 휴보 연구팀의 리더 오준호 카이스트 교수는 연구소 회식을 일 년에 딱 한 번 한다는데 연구환경의 문제라면 왜 같은 한국적 연구문화에서 누구는 회의비를 규정에 맞게 쓰고 누구는 남용하는가? 반대로 개인의 윤리 문제라면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한 교수들이 미국에서는 안 그런데 한국에 자리를 잡으면 회의비를 애매하게 쓰게 되는가? 회의비에 대한 나의 회의(懷疑)는 계속되지만 규정을 더 깐깐하게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거라는 데는 확신이 선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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