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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알바시네]53.눈꺼풀로 쓴 20만자, 영화 ‘잠수종과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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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편집 강의를 가는 길, 그리고 오는 길. 영화 '잠수종과 나비'를 보았다. 1995년 '엘르'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일어났던 일. 그는 아이와 새로 산 차를 타고 달리다가 발작을 일으키며 정신을 잃는다. 20일 간의 혼수상태 뒤에 이 남자는 이승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왼쪽 눈을 깜박거리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전신불수의 몸이 된다. 그는 1997년까지 15개월의 삶을 산다. 보비는 20만번 눈을 깜박여 150페이지의 자서전을 쓴다. 그 책이 '잠수복과 나비'이다. 영화는 이 자서전을 토대로, 영화 언어의 어휘를 기적적으로 넓혀놓았다.
간호사가 알파벳을 불러주고 그 중에 선택하고 싶은 것을 눈 깜짝임으로 고른다. 하나의 철자를 고르기 위해 거듭 반복되는 알파벳들. 여기에 필요한 인내심은, 표현의 가치와 욕망의 등가물이다. 우리는 소통의 수단을 얼마나 낭비해왔던가. 언어들은 얼마나 형편없이 천하게 구사되었던가. 죽은 육신과 다름없는 그의 정신이 꺼내고자 하는 언어욕망들은, 내 일상의 모든 소통들을 재고하게 한다. 대체 왜 말하며 왜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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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주인공 '장 도'의 그 하나 남은 눈 안으로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은 흐리고 중첩되며 또 벽처럼 갇혀있으며 단절되어 있다. 그의 오른쪽 눈을 꿰매는 장면은 내가 한 영화 체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아닐까 한다. 바늘을 들고 눈의 위아래 꺼풀을 봉합할 때 세상이 바늘땀 만큼 사라지기 시작한다. 속눈썹이 껌벅거리며 남은 풍경을 붙잡으려 애쓴다. 그러나 장 도의 영혼은 이런 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담담하다. 유머와 낙천주의가 영화의 빛깔까지 담백하게 한다.
자서전의 '잠수복'은 물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입는 옷이고, 영화의 '잠수종'은 물밑에서 작업하기 위해 물을 밀어내는 거대한 종이다. '나비'는 장자의 번신(飜身)이 떠오르게 하는 비유이다. 종은 무겁고 나비는 가볍다. 종은 가라앉지만 나비는 날아간다. 한 사람 속에 어마어마한 무게의 종이 있고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나비같은 영혼이 있다. 자기의 몸 속에 완전하게 감금되는 전신불수는 잠수종이며, 그것은 죽음으로 가라앉는 현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장 도가 말하듯 그는 눈알 외에 움직일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억이며 하나는 상상이다. 그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는 것에 관하여 육신의 제약이나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 또 생각을 마음대로 펼쳐갈 수도 있다. 꿈꾸기는 전신마비의 감옥 속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나비이다. 프랑스어 '빠삐용'은 감옥을 뜻하지만 나비라는 의미도 지닌다. 감옥을 벗어나 영혼의 날개를 편 작은 벌레. 인간의 문제는 결국 감옥과 나비의 문제이다.

많은 글을 쓰면서, 즐거운 일과 괴로운 일을 각각 많이 만났다. 세상에 대해 알게 되기도 하고 더욱 모르게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다가왔다가 사라졌다. 사건들도 그랬다. 밤낮으로 쏟아낸 언어들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기도 했지만, 또 나를 승천하게 하고 내 정신을 고양시키기도 한 듯 하다. 인간이란 그 조건이 다르긴 하지만 잠수종과 함께 가라앉으며 나비를 꿈꾸는 양상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20만번의 윙크 만큼 절절하고 강력하게, 목숨을 다해 글을 쓸 수 있는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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