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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분노의 서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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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무실 모니터 한 귀퉁이에 메모 하나를 살포시 붙여놨다. '들어주기, 이해하기, 기다리기' 아이들에게 자꾸 화내는 것도 습관이고 아이들이 야단을 맞는 것도 나쁜 습관이니 저 글을 보면서 수양을 하라는 마나님의 당부를 받들고자 낯간지러운 짓을 감행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메모를 본 후배가 제 낯이 더 간지럽다며 놀리는 바람에 떼어버릴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과연 나는 수양을 제대로 하는지 되물으면서. 답을 얻기도 전 묵직한 질문이 고개를 쳐든다. '한국인들은 왜 감정 억제가 서투른가'.

어제(25일)는 총기 난사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끄제(23일)는 천안에서 일가족이 어느 침입자의 칼부림에 쓰러졌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빚어진 참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층간 소음 살인, 묻지 마 폭행, 차량 시비…. 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현실에 누구는 개인의 도덕적 일탈을 꾸짖고, 누구는 각박한 세태를 질타한다. 과연 우리 사회의 우울과 불안과 좌절이 '격분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있냐고.
결말이 좀 덜 불행해서 그렇지 사실 우리는 자주 욱하고 종종 폭발한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을 때면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이건 확실히 나다), 직장 후배들이 실수할 때마다 눈을 희번덕거리고(가끔은 나다), 초보운전이 앞길을 가로챌 때는 여지없이 경적을 울리고(결단코 내 마나님이다), 고매하신 국회의원들도 걸핏하면 삿대질에 욕설을 퍼붓고. 인터넷 검색어에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 단골처럼 오르내리는 것은 감정 억제가 우리 사회의 고민임을 방증한다. 마침 유튜브에서는 손현정 박사(생물학)의 분노 조절법 강의가 화제다.

"생물학적으로 분노는 불안과 공포로 인해 '편도체 납치'가 일어나면서 이성의 뇌가 마비되는 현상…화를 느낄 때는 '내가 지금 화가 나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러니 기분 좋은 생각으로 바꾸어야지 하고' 자기 암시를 해야 한다."

'톰 소여의 모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불같은 성격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서랍을 이용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그를 저주하는 편지를 써서 바로 부치지 않고 사흘간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을 때 보냈던 것이다. 감히 비교하면, 저 모니터 메모는 마크 트웨인의 서랍이다. 서랍이 분노를 삭혔던 것처럼 메모는 화를 다스리는 주문이다. 작은 분노가 쉽게 용인되는 사회는 결국 큰 분노에 신음한다. 격분 사회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는 작은 분노를 가둬둘 마음속 서랍이 절실하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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