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은 9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라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민정수석이 여야 합의사항과 비서실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데 대해 인사권자(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하는 등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과거 민정수석의 국회출석이 다섯 번이나 있었고, 설사 출석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했어도 직속상관인 김 실장의 명령을 현실적으로 수석비서관이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김 실장은 김 수석의 법조계 대선배(각각 사시 12기, 24기)이며 공직기강이 가장 확실한 청와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편 김 수석은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문공세에 몰려 청와대와 박근혜 대통령을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문건 유출 사고는 김 수석의 근무 이전 일이지만, 최근 검찰 조사 과정에서 민정수석실이 최모ㆍ한모 경위를 회유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민정수석실 책임자인 김 수석의 해명이 필요하다.
바라보는 방향을 조금 바꾸면 12일 있을 박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을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회견에서 김기춘 비서실장과 실세 비서관 3인방(이재만ㆍ정호성ㆍ안봉근 비서관)의 거취문제 등 청와대 인적쇄신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언급해야 하는데, 김 수석의 '해임'으로 이를 대신하는 모양새를 만들 유인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김 수석 본인의 해명이 모두 진실이라면, 그의 사퇴는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는 것과 박 대통령이 대답해야 할 곤란한 질문의 추가를 맞바꾼 결정이 될 수도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박 대통령은 김 실장과 3인방에 대한 유임을 결정하고 그에 대한 설명으로 "추후 수사에서 잘못이 발견된다면 일벌백계 하겠다"거나 "경제활성화를 위해 국정안정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울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는 박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명분이지만, 청와대 고위 참모진 간 '항명파문'이 벌어질 정도로 공직기강이 무너졌다는 비판이 더해짐에 따라 박 대통령은 파문 당사자들을 유임시키기 위한 명분 하나를 3일안에 추가해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떠안게 된 셈이기도 하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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