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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27. 러 지하철版 세월호 ‘메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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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트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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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2014년 4월 16일 그날 나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한국인 가이드로부터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남해 바다에 배가 침몰했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했다. 먼 곳에서 듣는 고국의 참사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전화기는 해외로밍을 하지 않았기에 죽은 듯 있었다. 가이드는 이후에도 틈나는 대로 세월호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낯선 땅에서 신기한 것들을 기웃거리느라 그 참혹의 선내(船內)로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영화 '메트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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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지하 200미터까지 내려가는 러시아 지하철을 탔다. 벽화, 조각품, 천장 그림, 기둥 장식...역사(驛舍)마다 궁전이나 갤러리를 방불케하는 다채로운 장식이 눈을 붙잡았다. 러시아 지하철은 1935년에 개통되었고 12개 노선에 182개의 역사가 있다. 하루 700만명 정도가 이용하는 대중 교통수단이다. 원형의 노선과 중심에서 바퀴살처럼 방사형으로 벋어나가는 노선의 형태가 인상적이다. 안내방송을 하는 아나운서가 남자면 도시 진입 열차이고, 여자면 외곽행 열차라는 점도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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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트로, 마지막 탈출’은 2013년에 개봉되었으나 한국에 소개된 것은 올해 2월13일이다. 그 두달 뒤에 모스크바 메트로를 탔으니, 나는 이 영화를 보고갔어야 했다. 그랬으면 생생한 공포와 현장감을 만났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석달 뒤인 7월에 러시아에선 진짜 지하철이 탈선하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출근길의 시민 20명이 숨졌고 160여명이 다쳤다. 현실과 영화 사이, 그리고 영화와 현실 사이에, 인간은 비극에 부딪치고 또 그 비극을 스토리텔링하며 삶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쌓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트로 5

메트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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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메게르디체프의 영화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러시아 여행에 대한 추억을 먼저 떠올렸다. 모스크바는 늪에 가까운 황야에 세운 도시인지라, 산이 거의 없다. 야토막한 언덕 하나가 대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다. 그 언덕에서 바라보는 이 도시는 고풍의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찬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천루라고 일컬을 고층빌딩은 없었는데, 지반이 약해서 길쭉한 건물을 물고있을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지하철을 깊게 판 까닭도 오카강의 지류인 모스크바강과 멀리 볼가강을 넘나드는 수맥들이 이 도시의 지하를 부실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핵전쟁이 나도 끄덕없을 만큼 안전한 방공호로 쓰기 위해 기획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런 전략이 있었다 쳐도, 원초적인 약점을 커버하는 것과 맞물려 짜낸 것이리라.

메트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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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트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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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모스크바시민들이 무의식처럼 지니는 공포를 건드리고 있다. 언젠가 도시가 강물에 의해 무너지고 잠길 수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참사는 늘 징후에 대한 둔감이나 불감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불시에 오는 것이 아니라, 수천번의 사전 경고 이후에 그 주의를 무시한 결과로 닥치는 것이라는 대재앙의 공식. 한 역무원은 지하철 터널 속을 순찰 하다가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행정 담당자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담당자는 그를 주정꾼으로 매도하며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영화 '메트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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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사고가 나면 언론들은 대개 느닷없는 우국지사가 된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정부의 방심과 소홀을 향해 뒷북을 치면서 인재(人災) 타령을 한다. 그럴 줄 알았다면 그걸 사전에 막기 위해 효율적이고 영향력있게 활동을 했어야할 자신의 책임은 까먹는다.

세월호의 경우는 사실, 보통 참사와는 좀 구분을 해서 생각해야 한다. 어떤 정치인은 이의 본질을 해상 교통사고로 보기도 하는데,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는 발언이다. 세월호의 문제적인 참극은 교통사고가 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고 이후의 대처가 잘못 되어, 구할 수 있었던 희생자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사전의 인재가 아니라 사후의 인재(人災)다. 이런, 구난의 치명적인 미숙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며, 살릴 사람을 고스란히 모두 죽였다는 점에서 사고를 낸 세월호의 선주보다도 더 죄가 크다. 다만 책임을 누가 져야하는지에 대해선, 흥분어린 매도보다 냉철한 규명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사고 유발자와 사망 유발자를 구별해서 다뤄야 하는 점, 그것이 진짜 시스템의 적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정책자의 판단 소홀에서 나온 것인지를 가려낼, 사심없는 눈이 필요하다.

영화 '메트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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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경고를 놓치고, 모스크바를 달리던 지하철은, 지하터널의 물이 가득 찬 선로에서 탈선을 한다. 열차가 놀란 뱀처럼 꿈틀거리며 지하벽을 들이받을 때 객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아비규환은 내가 마치 그 안에 함께 있는 것처럼 현기증이 난다. 우리가 재수 없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는 우연한 참사는, 저 끔찍한 풍경을 현실의 날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요동치던 열차가 멈췄을 때 사망하고 실신한 신체들이 핏덩어리로 늘어져 겹쳐 쌓였다. 영화는 이것이 결말이 아니라, 거의 시작이다. 지하 200미터의 감옥 속을, 살아남은 사람들은 탈출할 수 있을까.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러시아가 낯설었던 건,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는 키릴어들만 퉁명스럽게 거리를 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지인들도 전혀 영어를 하지 못했다. 언어로만 보자면 이 도시는 완벽한 외계였다. 하지만 무뚝뚝해보이고 원칙주의자적이고 거칠고 뻐기는 기색도 있어보이는 그들은 뜻밖에 순수하고 낙천적이며 인간미가 있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다.

영화 '메트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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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여주인공(스베트라나 코드첸코바)의 불륜장면을 먼저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불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우리와는 아주 달랐고 미국적인 사고와도 조금 달라 보였다. 일벌레 의사인 안드레이(세르게이 푸스케팰리스)는 아내의 불륜을 알고 있으나 말을 못 꺼내고 있다. 그는 아내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다만 떠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내는 격렬한 사랑을 나눈 연인이 좋긴 하지만 딸과 딸이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막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려는 날, 지하철 참사가 일어나고 딸 크세니아와 아버지, 그리고 연인은 우연히 그 속에 갇힌다.

지하철의 탈선과 인간의 탈선이 만났을 때, 지하철의 선로를 바로잡으려는 안간힘처럼 인간 또한 그 탈선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사랑이 시작되던 때의 마음을 회복한다. 참사 속에서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원수이던 두 남자는 서먹한 조우와 격렬한 싸움과 고난 속의 전우애를 겪는다.

영화 '메트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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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일행 속엔 또 하나의 커플이 있었다. 처음엔 지하철 작업남으로 여겨지는 한 청년과 아름답고 냉담한 한 여인. 사고 이후 그녀가 심각한 천식환자인 것이 밝혀지면서 그녀를 위한 청년의 헌신은 이 영화에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 액자로 아로새겨진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참사도 세상사의 일부이며, 그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낙천적인 감각을 러시아 감독은 영화 속에 감동적으로 그려놓았다. 그들이 스탈린이 뚫어놓은 비밀벙크를 통해 탈출하게 된다는 설정은, 모스크바 도시신화를 스토리텔링으로 들어앉힌 센스일 것이다.

몇 가지 기억나는 대목 중에서, 열차가 몹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가운데 언뜻 보인 폐사(廢舍)된 유령역의 이미지와, 탈출하던 사람들이 물 속에 전류가 방전되는 바람에 모두 감전사하는 끔찍한 장면은 마음에 남았다. 탈출 대열 중에 강아지를 한 마리 넣어놓은 것은, 러시아다운 ‘여유’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하철 선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일시에 굳어지는 액체질소를 무제한 투입하는 대책을 내놓는 것을 보고 끔찍했다. 부실한 지하를 아예 이 물질로 굳혀버리겠다는 ‘무자비한 땜질’을, 실제로 한번 쓴 적이 있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거기에 생존한 시민이 있다면 액체질소장(葬)을 치를 판이니, 세월호의 수장(水葬)의 지하철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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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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