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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두향의 어깨를 당겨 껴안았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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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47)

[千日野話]두향의 어깨를 당겨 껴안았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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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군요. 마지막 구절에 버드나무 줄기가 백 번의 이별을 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지요?"

"그건… 버드나무에 얽힌 옛사람들의 사연을 떠올리면 맛이 있을걸세. 옛날 지방의 항구엔 관리로 부임했다가 떠나는 사람이 많았고 그런 와중에 슬프고 아픈 이별도 많이 생겼지. 특히나 그런 인사(人事)는 봄날에 나는 법이라. 버드나무는 물가에 잘 자라는 나무이지. 떠나는 남자에게 보내는 여인은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그걸 심어 날 보듯 바라보라고 말하곤 했지. 고려시인 정지상(鄭知常)이 읊은 '송인(送人)'이란 시 속의 여인은 필시 버드나무 가지를 손에 쥐고 있을 거야. 항구의 이별을 담은 시니까 말이야. 또 절양류(折楊柳)는 강변의 버들을 꺾어 떠나는 손님에게 주며 눈물로 읊는 이별의 시를 말하지 않던가. 한자 柳(버들 류)는 留(머무를 류)와 음이 같아서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라도 더 머무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 것이라네. 백 명의 남녀가 봄마다 항구마다 연인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쥐여주며 헤어지는데도 다음 해 봄이면 다시 버들이 백 개의 가지를 드리운다. 이별보다 강한 것은 새로운 사랑이라는 것이지."

"아아, 참으로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세 가지는 식물(오동나무, 매화, 버드나무)인데, 한 가지는 사뭇 다른 달(月)인 것이 눈에 띕니다. 어찌해서 네 가지 식물을 다루지 않았을까요?"
"잘 보았구나. 그 소재들은 그냥 아무렇게나 고른 것이 아닌 듯하구나. 이것들은 모두 기녀들이 자신을 가탁(假託)했던 것들이 아니더냐. 오동나무는 거문고였기에 그녀들의 분신이었고, 매화는 그녀들의 향기였고 지조였지. 버드나무는 그녀들의 가슴 아픈 이별이었고, 달은 그녀들의 사랑의 밤과 한숨 가득한 이별의 밤들을 비추는 것이었지. 화류의 삶을 사는 기생들은 이 네 가지 벗을 소재로 삼아, 그 슬픔을 이겨내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늙는 것, 추운 것, 이지러지는 것, 이별하는 것."

"과연! 그러하군요. 마치 저의 일상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 시간들이 들어있군요. 오동나무는 1000년의 시간이고… 매화의 일생은 꽃 하나만 보자면 겨울 석달이고… 달이 이지러지는 것은 1년에 12번이니 천 번을 이지러지려면 어림잡아 100년쯤 되겠네요. 버들줄기가 100번 찢어지는 것은 봄날 한철이지만 다음에 다시 100번 찢어지는 것까지 감안하면 1년이네요. 이 시를 다시 읽어보니 1000년-3개월-100년-1년이니… 음률로 말하자면 강-약-중-약으로 높낮이와 세기의 흐름을 타고 있군요. 또 천년은 예술의 시간이고, 석달은 향기의 시간이며, 백년은 인간의 수명이며, 1년은 사랑의 시간이군요. 예술에 의지하면 천년을 살고 미색에 의지하면 석달이고 사랑에 의지하면 고작 일년을 갈 뿐이니… 인간 백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

"두향의 주석(註釋)은 늘 놀랍도다. 시 속에 살아 움직이는 음악을 발견해내니 보통 재능이 아니로다. 인간 백년의 무상이야, 어찌 기녀들만의 슬픔이겠는가. 다만 그 삶의 굽이와 고비마다 뜻을 지키고 향기를 팔지 않으며 사는 것이, 저 시가 말하는 요체가 아니겠느냐."

저녁답 두 사람은 관아로 돌아와, 이요루에 올라 차(茶)를 마셨다. 어둠 속에서 더욱 크게 울리며 올라오는 물소리를 들었다. 계곡 안쪽에서는 큰 안개가 구름처럼 흘러다닌다. 퇴계는 말없이 두향의 어깨를 당겨 가만히 껴안았다. 그는 말을 꺼냈다.
 "단양은 나같이 어리석고 둔한 자들이 가히 숨어지낼 만한 곳이네. 굳이 세상을 벗어나지 않아도 이미 선계(仙界)로 들어와 있으니, 다만 이 산과 물을 어떻게 즐기느냐의 문제만 남았네."

"나으리는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를 낮추시니 가히 소녀는 설 자리가 없사옵니다. 다만 그 산수(山水)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데, 나으리의 은혜를 깊이 입었으니 요즘은 온통 무릉계곡을 거니는 기분이옵니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매화는 추워도 향기를 팔지않아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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