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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비인간적 '시각 폭력'에 길들여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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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었다'·'더 에이트 쇼'에 담긴 시선
불완전함 보완하는 렌즈, 관음증 변모 촉발
촉각적 시각의 가능성에 희망 걸어야 할 때

영화 '그녀가 죽었다'에서 구정태(변요한)는 공인중개사다. 의뢰인이 맡긴 열쇠로 집에 몰래 들어가 사생활을 훔쳐본다. 직업적 특혜로 여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유튜브 방송 모습의 이면을 확인하며 뿌듯해한다. 관음증적인 시각적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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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탕에는 현전성(現前性)이 극대화된 시각 중심주의가 있다. 사물들을 눈앞에 세우고 현전하는 것으로 만들어, 연구하고 이용·접근한다. 대상과 거리를 둔 상태에서 그것을 마치 초월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파악·장악·소유하려는 경향이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덟 명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갇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시간이 쌓이면 돈을 버는 게임을 하면서 분열과 대립을 반복한다. 주최한 검은손은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폐쇄 회로(CC) TV로 여덟 명을 재미있게 지켜볼 뿐이다.


은밀한 관찰은 근대 시각 중심주의를 가리킨다. 곳곳에 배치된 렌즈는 인간의 시각이 지닌 불완전함을 보완한다. 더 멀리, 더 정확히 보게 한다. 그래서 관음증적 시선을 증폭하는 도구가 된다. 예컨대 여성을 몰래 훔쳐보고 알고자 한 근대 남성의 시각적 욕망은 망원경을 거쳐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정점에 이르렀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1954)'에서 이웃을 훔쳐보는 사진작가 제프(제임스 스튜어트)가 그 대표적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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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연 작가는 저서 '시각의 폭력'에 "무엇보다도 현재 여성에 대한 불법 촬영 등에 이용되는 것이 카메라 렌즈"라고 썼다. "카메라 렌즈는 처음에는 고정된 외눈으로 외부 대상과 연루되지 않은 채 바라보는, 관조적으로 응시하는 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해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지지 않으며, 대상과 거리를 둔 채 그것과 연루되지 않는 관조의 시선은, 곧 은밀하고 탐욕스럽게 그 피사체를 지배·통제·착취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몰래 바라보는 관음증으로 변모해갔다."

오늘날 망원렌즈를 이용한 제프의 엿보기는 고전적 수법에 불과하다. 이제는 소형 카메라 렌즈가 아파트, 학교, 직장 등 곳곳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일부는 몰래 훔쳐보는 불법 촬영에 이용된다. 포착되는 대상은 온라인 사이트에 업로드되면서 보는 자의 눈앞에서 시간이 제거된 채 뒤틀리고 파편화된 몸의 형상으로 현전한다. 낯익은 폭력이다. 불과 4년 전 전대미문의 성폭력 사건인 텔레그램 'n번방'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경찰은 9개월 동안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를 운영해 피해자 1154명을 확인했다. 여기서 60.7%는 미성년자였다. 가담자 3755명이 검거됐고, 이 가운데 245명이 구속됐다. 주동자 '갓갓'에게는 징역 34년, 운영자 '박사'에게는 징역 42년이 선고됐다. 사람들에게 디지털 성폭력이 단순한 음란물 문제가 아니라 명확한 중범죄임을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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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뿌리는 아직 근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편승해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형국이다. 지난 21일 드러난 '서울대 n번방' 사건이 대표적 예다. 딥페이크 성범죄다. 범행의 수법, 대상, 목적 등에서 'n번방' 사건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가해자들은 AI 기술을 이용해 성 착취물을 만들고 유포했다. 사진 한 장으로 벌어지는 범죄라서 피해자들은 사실상 대비가 불가했다.


초월적이고 폭력적인 빛은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다. '앞에 있는 피사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근절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 순간 철학과 윤리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정 대상을 지배·착취하려는 관음증과 그것이 근거하는 관조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한다. 타자 옆에 자리하고, 그 내부와 접촉해 공존하려는 촉각적 시각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야 할 때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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