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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마지막 왕자 이우

최종수정 2019.11.15 09:25 기사입력 2019.11.1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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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마지막 왕자 이우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11길 19, 인사마당 공영주차장 입구에 '사동궁 터'를 알리는 표지가 있다. 사동궁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왕 이강이 살던 집이다. 흥영군 이우가 1912년 11월15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우가 태어날 때는 한일합방(1910년) 이후라, 부자가 한가지로 망국의 잔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황실의 피붙이가 대부분 지리멸렬한 데 비해 두 사람은 존재감이 선명하다. 이강은 항일독립투사들과 활발히 접촉했다. 1919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하려다 실패했다. 일제가 여러 차례 도일(渡日)을 강요했으나 끝까지 거부했다.


고종의 손자요 순종의 조카인 이우를 흔히 '조선의 마지막 왕자'라고 한다. 경성유치원과 종로소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1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우가 사관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1926년 12월1일 공포된 '왕공가궤범' 때문이다. 일본 왕실령 제17호로,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 18세가 되면 육군, 해군 무관으로 임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1929년 4월1일 이우가 사관학교에 들어간 날부터 11월14일까지 226일간의 일상을 기록한 일지가 있다. '어훈육일지(御訓育日誌)'.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 제4중대 1구대장 사토 중위가 쓴 감시일지다. 사토는 이우가 체격은 왜소하지만 체력이 강했고 교관에게는 반항했지만 동료에게는 너그러웠다고 썼다. 7월5일 국어시간에 '불사조' 강의를 듣자 즉각 수업을 거부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관학교 동기인 아사카 다케히코는 "(이우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에 새기고 있어서 일본인에게 무엇이든 앞서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했다. 공부뿐 아니라 운동 등 모든 면에서 일본 급우들보다 우수했다고 한다. 아사카는 이우가 "화가 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싸울 때는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도 했다. 술에 취하면 '황성옛터'를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일제는 이우를 일본 여성과 결혼시키려 했다. 야나기사와 야스츠구 백작의 딸이 배필로 내정됐다. 그러나 이우는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어릴 때 몇 번 만난 사이인데 1932년 이우가 방학을 맞아 귀국했을 때 부쩍 가까워졌다고 한다. 장충단에서 자주 데이트를 했다는 목격담이 전한다. 부부는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 이청은 미국의 마켓대학과 드폴대학에서 공부해 대학교수가 됐다. 차남 이강은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이우는 동남아시아와 중국 전선에 배치됐다. 1945년 7월 히로시마로 옮겼으나 8월6일 미군의 원자탄에 목숨을 잃었다. 몸이 불편한 부관 요시나리 히로무를 자동차에 태워 보내고 자신은 말을 타고 사령부로 출근하던 길이었다. 폭심(爆心) 가까운 곳에서 피폭된 그는 7일 오전 5시5분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이우의 유해를 조선으로 옮긴 8일, 요시나리는 권총 자살했다. 8월15일 경성에서 이우의 장례식이 열릴 때, 라디오에선 일왕의 항복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우는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운현궁 가족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혼백은 일본에 붙들려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은 이우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가족의 동의는 구하지 않았다. 자손들이 합사 명단에서 삭제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외면해왔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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