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존귀한 존재다. 그래서 남존여비와 출가외인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평생 동안 국록으로 생활했다. 의무를 꼽으라면 결혼 후에도 궁중의 잔치나 각종 왕실 경조사에 참석하는 정도다. 그래도 ‘존재’ 자체가 빛나 일거수 일투족이 백성의 찬탄과 환호의 대상이 된다. 일례로 지금도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는 영국의 샬럿 공주는 사진이 공개될 때마다 입었던 옷이 순식간에 매진돼 첫 돌 때 이미 ‘최연소 완판녀’로 등극했다.
공주가 백성의 사랑 속에서 빛을 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록 아버지가 최고 권력자라 하더라도- 권력의 핵심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결탁해 백성의 피눈물을 자아내는 권력을 휘두르는 공주의 모습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모든 주권과 권력이 국민에 기인하는 민주공화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현대판 공주’는 존재한다. 단 국민적 사랑을 받기 위해선 유럽처럼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전제돼야 한다. 공주의 소임은 그저 천부적인 특권을 ‘조용히’ 누리면서 대중에게 아름다운 사랑의 판타지를 심어주는 것으로 족하다. 혹여 공주가 현실 세계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이는 어린이가 총을 만지는 것처럼 위험하며 예측 불허의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불행히도 2016년 대한민국에서 이런 우려가 현실로 전개되고 있다.
박근혜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현대판 비운의 공주였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20대 초반에는 어머니가, 20대 후반에는 철권 통치자 아버지까지 측근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청와대를 떠났다. 이후 정계에 입문할 때까지 18년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 측근들조차 모두 공주를 등졌던 이 ‘배반의 시기’에 최씨 일가는 공주 옆에 있었고 이 인연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과 국가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고리가 됐다는 게 대통령의 설명이다. 물론 국민들은 전혀 공감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20-50클럽(1인당 국민 소득 2만달러이면서 인구 5000만명 이상인 국가)에 가입한 자랑스러운 국가다 . 하지만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만 보더라도 전체 임금 근로자 중 월 소득 200만원 미만이 45.8%며 200만~300만원인 근로자도 25.6%다. 이 돈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야 하는 대다수 국민들로선 호스트바 접대부 출신·헬스 트레이너·마사지숍 원장 등을 앞세운 무교양한 민간인 중년 여성이 국기 문란과 국정 농단의 대가로 천문학적인 혈세를 주물렀다는 소식에 분노가 폭발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국가 원수’라면 사과문에서 국정 혼란을 자초한 자신의 과오를 통렬하게 책임지고 시계 제로인 현 정국을 냉철하게 수습할 ‘현실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아직도 ‘비운의 공주님 코스프레’를 하면서 신세 한탄 섞인 사과문을 낭독했고 국민들은 20만 촛불 시위로 반응했다. 도대체 누가 슬픈 개인사를 가진 현대판 공주님을 둘도 없는 대통령감으로 포장하고 옹립해서 국가를 운영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박근혜 대통령 옆에 최순실이 있는 걸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는 김무성의원의 발언처럼 ‘수첩 공주’ 덕분에 금배지를 단 여당의원들은 현 사태에 대해 대통령과 함께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이라도 권력욕에 눈이 멀어 ‘선거의 여왕’을 앞세워 목적 달성한 죄를 참회하면서 국민의 분노를 달래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대통령과 자신을 차별화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국민은 치솟는 분노에 역겨움까지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작 동화에서 판타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공주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나야 인생도, 행복도 완성되는 ‘매우 의존적’인 존재다. 공주가 멋있는 군주(지도자)로 변모해 국민의 삶을 개선시켜 줄 것이란 환상에 빠졌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금 ‘무지(無知)의 죄’ 값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황세희 국립의료원 공공보건연구소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