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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칼럼]칼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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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상일 논설위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반기 화두가 된 ‘공정’ 말이다. 한 달 전 이 칼럼에서 ‘정의’나 ‘공정’이 그저 한때의 구호에 불과한 ‘한 여름밤의 꿈’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었다. 순식간에 '공정'은 늘 써먹는 수식어가 됐고 언급안하면 뭔가 허전한 양념이 됐다. 그런데 번지르르만 했지 내용이 별로 없다.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는 기미도 있다. 무엇보다 정부와 여당의 대처가 시원치 않다. 오죽하면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구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겠나.

원래 상대편의 말을 슬쩍 내 것인 양 돌리면 상대편의 위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영국 노동당이 보수파의 단골메뉴인 시장 경제를 꺼내 쓰면서 집권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명박 정부가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후 ‘공정’을 들고 나온 것은 전략적으로 가장 잘한 것일 게다. 부패한 보수, ‘고소영 정권’ ‘강부자 정권’ 이미지를 좀 닦아낼 수 있어서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게 정부와 여당의 한계다. 한 여당 의원은 "공정사회에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책임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자원봉사"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기업 회장들을 불러 ‘상생’을 주문한다. 자원봉사나 상생도 중요하지만 과연 그렇게 돼서 공정사회가 이루어질까. 얼마 전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상생 회동을 하고 나온 대기업 총수는 지난 30년간 상생을 해봐도 잘 되지 않으며 부장 과장 대리급이 체감하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기업이란 이익 앞에서는 불법과 편법이 상생보다 가깝기 마련이다. 윤리만 주문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미국의 간판기업이고 빌 게이츠 회장은 한국재벌 총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액수를 기부하고 나눔을 실천한다. 그래도 미국 공정위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다른 제품을 끼워 강매하자 법으로 걸고 처벌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초기 강조한 ‘비즈니스 프렌드리’ 원칙을 여전히 우선하면서 ‘공정’을 적당히 버무리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니 공정거래위원회가 눈치를 보고 알아서 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의 칼을 써야 할 데 쓰지 못하니 어설픈 공정이 되는 것이다.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위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강했다. 재벌의 불공정 거래를 조사하고 출자총액제도를 지키도록 강제하고 신문사까지 조사했다. 당시에 높던 민주당 목소리는 어디에 갔나. 단골 메뉴를 여당에 뺏긴 데 대한 긴장감도 이제 없는 것 같다. 청문회에서 ‘공정 사회가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식의 결의를 다지거나 '담대한 진보' 등 추상적인 말만 하고 있을 뿐이다.

뭘 할 것인가는 이미 다 나와 있다. 대통령에게 ‘공정사회’ 어젠다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 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 시절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었다. 즉 "왜 음악을 다운로드 받으면 가수나 작곡가가 아니라 채널을 독점한 통신사에서 절반 이상의 수익을 가져가야 하나" "왜 드라마 제작사들이 만든 프로그램의 판권을 MBC와 KBS 등 채널을 독점한 거대 방송사들이 가져야 하느냐". 그는 또 고객이 상담을 받고 있는 은행 직원에 대해서도 알 수 있도록 정보 비대칭문제가 해결되면 금리도 내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사항을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민감한 사항이라고 외면할 일이 아니며 눈감아주던 것에도 칼을 대야 한다. 공정위가 제 역할을 하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공정한 사회를 체감할 수 있다. 자꾸 '상생', '나눔'만 남발하다가는 국민들의 공정 혐오증이 생길지 모른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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