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상대편의 말을 슬쩍 내 것인 양 돌리면 상대편의 위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영국 노동당이 보수파의 단골메뉴인 시장 경제를 꺼내 쓰면서 집권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명박 정부가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후 ‘공정’을 들고 나온 것은 전략적으로 가장 잘한 것일 게다. 부패한 보수, ‘고소영 정권’ ‘강부자 정권’ 이미지를 좀 닦아낼 수 있어서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게 정부와 여당의 한계다. 한 여당 의원은 "공정사회에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책임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자원봉사"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기업 회장들을 불러 ‘상생’을 주문한다. 자원봉사나 상생도 중요하지만 과연 그렇게 돼서 공정사회가 이루어질까. 얼마 전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상생 회동을 하고 나온 대기업 총수는 지난 30년간 상생을 해봐도 잘 되지 않으며 부장 과장 대리급이 체감하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기업이란 이익 앞에서는 불법과 편법이 상생보다 가깝기 마련이다. 윤리만 주문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초기 강조한 ‘비즈니스 프렌드리’ 원칙을 여전히 우선하면서 ‘공정’을 적당히 버무리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니 공정거래위원회가 눈치를 보고 알아서 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의 칼을 써야 할 데 쓰지 못하니 어설픈 공정이 되는 것이다.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위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강했다. 재벌의 불공정 거래를 조사하고 출자총액제도를 지키도록 강제하고 신문사까지 조사했다. 당시에 높던 민주당 목소리는 어디에 갔나. 단골 메뉴를 여당에 뺏긴 데 대한 긴장감도 이제 없는 것 같다. 청문회에서 ‘공정 사회가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식의 결의를 다지거나 '담대한 진보' 등 추상적인 말만 하고 있을 뿐이다.
뭘 할 것인가는 이미 다 나와 있다. 대통령에게 ‘공정사회’ 어젠다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 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 시절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었다. 즉 "왜 음악을 다운로드 받으면 가수나 작곡가가 아니라 채널을 독점한 통신사에서 절반 이상의 수익을 가져가야 하나" "왜 드라마 제작사들이 만든 프로그램의 판권을 MBC와 KBS 등 채널을 독점한 거대 방송사들이 가져야 하느냐". 그는 또 고객이 상담을 받고 있는 은행 직원에 대해서도 알 수 있도록 정보 비대칭문제가 해결되면 금리도 내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사항을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민감한 사항이라고 외면할 일이 아니며 눈감아주던 것에도 칼을 대야 한다. 공정위가 제 역할을 하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공정한 사회를 체감할 수 있다. 자꾸 '상생', '나눔'만 남발하다가는 국민들의 공정 혐오증이 생길지 모른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
꼭 봐야할 주요뉴스
"하이브 연봉 1위는 민희진…노예 계약 없다" 정면...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