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이상훈의 한국유사] 삼별초 진압에 앞장선 고려군, 그 이면엔 왕권강화

최종수정 2019.11.13 14:13 기사입력 2019.11.13 14:13

댓글쓰기

원나라의 강력한 군사력 견제로 고려 국왕의 군사통수권 제한적
원종 1271년 이후 군사회복 노력…제주도선 고려군이 점령 주도
적극 군사행동으로 발언권 확보…고려 자체 무기 제작 가능해져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삼별초(三別抄)는 고려시기 몽골에 대항한 대표적 세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음에도 삼별초의 항쟁은 40년 대몽항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몽골의 잇단 침입과 압박으로 강화도에서 버티던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還都)했다. 반면 삼별초는 이에 반기를 들고 끝까지 저항했다. 그래서인지 삼별초와 고려 정부의 이미지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몽골의 침입에 대한 정당한 자세로 보고 그런 삼별초와 대결한 고려 정부를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삼별초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고려 정부의 입장에서 삼별초를 바라보는 관점도 필요하다.


1270년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와 제주도로 이동하며 1270년부터 1273년까지 4년간 항쟁을 지속했다. 몽골군과 고려 정부는 연합해 삼별초 진압에 나섰다.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은 3군으로 편성해 100여척에 승선한 후 진도를 공격했다. 김방경·흔도는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으로, 왕희·왕옹·홍다구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장항(獐項)으로, 김석·고을마는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으로 진입했다. 벽파정에서 중군과 삼별초가 대치할 때 홍다구의 좌군이 화공(火攻)을 펴며 협공하자 삼별초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삼별초의 거점인 용장성(龍藏城)이 함락되고 홍다구는 삼별초가 내세운 승화후(承化侯) 왕온과 그 아들 왕환을 죽였다. 이때 진도의 백성 1만명이 몽골군의 포로가 됐다.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은 160척에 승선한 뒤 제주도를 공격했다. 중군은 함덕포(咸德浦)로 진입하고 좌군은 비양도(飛揚島)를 경유해 상륙했다. 중군이 상륙하면서 삼별초의 복병과 전투가 벌어졌고 정예군을 거느린 나유가 후속하면서 승리했다. 항파두성(缸坡頭城)의 동쪽에 상륙한 대규모 우군이 우세한 군사력으로 항파두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삼별초 병력 가운데 일부가 달아나고 항복한 1300명은 여몽연합군의 포로가 됐다. 일반적으로 여몽연합군의 삼별초 진압은 몽골군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高麗史)' 김방경 열전에 따르면 제주도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한 여몽연합군의 병력은 1만명이었다. '원사(元史)'에는 둔전군(屯田軍) 2000명, 한군(漢軍) 2000명, 무위군(武威軍) 2000명, 고려군 6000명으로 서술돼 있다. 총 1만2000명이다.


하지만 진도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한 여몽연합군의 규모는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 않다. 제주도 공격 시 1만2000명이 160척에 승선했으므로 척당 75명 정도가 탑승했음을 알 수 있다. 진도 공격 때도 동일하거나 비슷한 규모의 선박을 활용했다면 100여척에 약 7500명이 승선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진도가 제주도에 비해 원정거리가 짧아 보급 물자 적재량은 더 적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승선 인원은 7500명보다 조금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훈의 한국유사] 삼별초 진압에 앞장선 고려군, 그 이면엔 왕권강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고려사' 기록을 살펴보면 진도 삼별초 진압에 동원된 몽골군은 6000명이었다. 그리고 애초 몽골군 외에 고려군 6000명을 추가로 동원할 계획이었다. 그대로 실현됐다면 진도에 투입된 여몽연합군의 병력은 1만2000명이 된다.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되진 않은 것 같다. 당시 고려는 부위병(府衛兵)이 부족해 문무관 산직(散職), 잡색(雜色), 백정, 승려 등을 징발·충당하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몽골의 공격 계획은 4월에 하달되고 여몽연합군의 진도 공격은 5월에 실행됐다.


고려의 병력 동원력과 시간적 여유를 감안할 때 고려군이 몽골의 계획대로 6000명 모두 동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진도 공격에 동원된 선박 수가 불과 100여척이었다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고려군이 절반 정도 동원됐다고 본다면 진도 공격에 동원된 여몽연합군의 총 병력은 9000명 안팎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몽연합군의 진도 공략 시 주력은 몽골군이었다. 여몽연합군 9000명 가운데 6000명이 몽골군이었다. 상륙 후 삼별초와 최초 접전을 벌인 것도 몽골군의 홍다구였다. 포로 1만명을 처분한 것도 몽골군이었다. 삼별초가 내세운 승화후 왕온을 죽인 인물 역시 홍다구였다. 진도 삼별초 진압 후 고려 국왕은 몽골에 사례사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여몽연합군의 제주도 공략 당시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여몽연합군 1만2000명 가운데 6000명이 고려군이었다. 상륙 후 삼별초와 처음 접전을 벌인 것도 고려군이다. 선봉부대를 맡은 인물은 고려군의 나유였다. 삼별초 거점인 항파두성의 내성을 공격한 이도 고려군의 김방경이었다. 이에 포로를 처분한 것도 고려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항파두성 진압 후 고려군은 몽골군보다 두 배 많은 1000명을 주둔시키고 잔당 소탕까지 담당했다. 제주도 삼별초 진압 이후 몽골 황제는 김방경을 따로 불러 포상까지 했다.


여몽연합군의 삼별초 진압 상황을 정리해보자. 진도의 경우 몽골군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몽골군보다 고려군의 활약이 더 돋보인다. 실제 진압 과정과 전후 처리 과정을 보면 고려군이 주도적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불과 몇 년 사이 어떻게 고려군의 역할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고려 국왕의 군사통수권은 고려-원(元) 관계의 특수성으로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려의 군사제도는 원의 강력한 군사적 견제와 통제로 왜곡·변질되고 고려의 독자적 군사력 유지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려 국왕 원종은 1271년 5월 진도 삼별초 진압 이후 군사권 회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272년 6월 장군 나유에게 명해 군사 1500여명을 모집했다. 12월에는 초군별감(抄軍別監)을 여러 도(道)에 보냈다. 그리고 추밀원부사 송송례와 상장군 서유에게 명해 열병(閱兵)했다. 고려 자체의 병력을 모집하고 점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열병식은 국왕의 군사통수권을 대내외에 확인시키기 위한 행사였다.


1273년 2월 김방경이 정예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삼별초 진압에 나섰다. 원종은 그에게 부월(斧鉞)을 하사했다.


1273년 초 고려는 수백 단위 이상의 기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시 김방경은 지휘관으로서 실전 경험이 많지 않았으나 고위급 장수가 갖춰야 할 덕목을 잘 갖췄던 것으로 평가된다. 원종이 그런 김방경에게 도끼를 하사했다는 것은 광범위한 군사권을 위임했다는 뜻이다. 이는 원종의 군사통수권이 어느 정도 체계화·강화됐음을 시사한다.

[이상훈의 한국유사] 삼별초 진압에 앞장선 고려군, 그 이면엔 왕권강화

"왕이 울릉도의 벌목을 중지시켜줄 것, 홍다구 휘하 군사 500명의 군복 조달 일을 덜어줄 것, 삼별초 평정 뒤 제주 사람들을 육지로 내몰지 말고 예전처럼 생업에 안착시켜달라고 건의하자 원나라 황제가 모두 허락했다."


위의 기록은 제주도 삼별초 진압 직전인 1273년 2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원종은 1271년 5월 진도 삼별초 진압 후 몽골군에게 붙잡혀간 진도 백성들을 송환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몽골군 장수 흔도에게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몽골 황제와 중서성(中書省)에 요청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듯 여러 차례 묵살되던 원종의 건의가 제주도 삼별초 진압을 전후해 상당 부분 반영되기 시작했다. 고려군의 무기 자체 제작이 가능해졌다. 몽골의 과도한 군수품 요구와 인원 동원 자제 요청도 받아들여졌다.


무신정권기를 거치면서 원종은 완전히 붕괴된 중앙과 지방의 군사체계 가운데 일부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1270년 개경 환도 이후 태묘(太廟)를 재건하고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설치해 유교적 지배 질서 강화에 나섰다. 서서히 군사통수권을 회복하면서 고려군도 새롭게 모집·편성했다. 종친(宗親)과 총신(寵臣)의 재산 보호로 자기 측근 세력을 강화했다. 이렇게 강화한 측근 세력 중에서도 특히 김방경은 원종의 개경 환도에 앞장섰다. 그는 삼별초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원종은 왕권을 점차 강화하고 이로써 여몽연합군의 제주도 삼별초 진압과 일본 원정에 적극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적극적 군사행동과 고려군의 희생은 그에 상응하는 발언권을 몽골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원종의 왕권 강화와 군사력 확보 시도는 이후 공민왕에 이르러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