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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오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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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막바지 무렵에 언론을 통해 두 명의 화가를 만났다. 1인은 이미 고인이 된 유명 여류화가이며 다른 한 명은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청년미술가이다. 전자인 천경자 화백의 작품에 대한 근황은 신문기사로, 후자인 정중원 작가는 TV를 통해서 실물로 접한 것이다. 각각 환상적 화풍, 그리고 극사실주의 그림이 보여주듯 두 작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감으로 겹쳐지며 흥미를 더해준다.

천경자(1924~2015)화백이 1991년 4월“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한 뒤 절필까지 선언한‘미인도’는 25년 동안 위작 논란이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급기야 마지막으로 검찰청까지 개입하여 2016년 12월‘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위작’이라고 평가한 프랑스 감정팀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대한민국 검찰은 미술 비전문가”라는 뼈있는 한마디를 즉각 보탠 상태이다. 종결형이 아니라 다시 진행형임을 예고하는 느낌이다.
어쨋거나 위작이란 진품보다 예술성 혹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원본보다 더 뛰어난 위작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정중원 화가가 보여주었다. 당신이 직접 묘사한 정밀도 높은 인물화는 비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원본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뛰어났다. 어떤 측면에서는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다. 카메라로 찍으면 쉽게 될 일을 왜 저렇게 힘들게 땀 흘리며 그리는가 하는 의구심까지 주변에 일으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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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주의적 화면구성을 추구하는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 화가는 이런 작업에 대하여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원본보다 더 원본같은 짝퉁의 가상세계에서는 원본이 복제물을 카피하고 실제가 가상을 따라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난다고 역설했다. SNS세계를 그 사례로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다녀온 명승지나 맛집에서 받은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찍거나 기록을 통해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자 SNS에 올린다. 하지만 이런 일을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SNS에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특정 장소를 일부러 찾아가는 역전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행동은 실재이고 SNS는 가상이다. 일반적으로 실재 이후에 가상을 만들게 마련인데, 이제 실재와 가상이 뒤바뀌는 현상을 체험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것이 극사실주의 작품이 주는 무언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SNS 이전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도 가상세계 체험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악몽 이다. 꿈에서 맹수나 나쁜 사람에게 쫓길 때“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치다가 결국 절벽에 떨어지며 놀라서 잠을 깨고는 이내 현실로 돌아온다.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꿈인 줄 알았으면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달리지 않았을 텐데.”하지만 그런 투덜거림도 꿈을 깬 뒤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전에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 그때는 꿈이 꿈이 아니라 실재현실인 것이다. 깬 뒤에야 가상현실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온몸에는 식은 땀이 흥건하다. 꿈이라는 가상세계가 실재세계에 구체적인 결과물인 흔적까지 남겼다. 가상세계 역시 현실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유년기에 대다수가 경험하게 마련이다.

이제 여행지 역시 가상세계를 통해 먼저 만난다. 안내책자와 함께 인터넷에 올려놓은 홍보자료가 기본이다. 게다가 개인체험기까지 즐비하게 나열해 놓았다. 누구든지 계획단계부터 충분히 그 지역특성과 문화에 대한 자료를 숙지한 후 길을 나선다. 하지만 가상세계로 접한 뒤 높아진 기대치는 현실세계에서 실망치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않다. 알고 보니 기존의 여행자료란 남들이 만들어놓은 가상세계일 뿐이었다. 심지어 쇼윈도우 내지 모델하우스적 낚시 기능에 비중을 둔 것조차 미리 가려내지 못한 불찰까지 더해진 탓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제로베이스 상태로 여행지를 찾기 시작했다. 나름의 관점과 체험을 즐기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나만의 감각과 시각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지금은 무조건 그냥 출발한다. 주체적인 여행이 더 많은 것을 마음에 남긴다고 믿고서.
하지만 다녀와서 SNS를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몰라서 놓쳐버린 경우도 더러 보인다. 이것 만큼은 꼭 확인하고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감도 더러 뒤따르기 마련이다. 현실과 가상이라는 선후관계만 분명히 해둔다면 정답이 나올 것도 같다. 나의 현실세계와 남의 가상세계를 함께 모아둔다면 그 효과는 두배가 될 것이다. 나의 안목에 남의 경험까지 합쳐지는 까닭이다.

이제 컴퓨터만 켜면 가상이 현실처럼 전개되고 그 가상에 의해 희노애락이라는 현실이 다시 만들어진다. 댓글이나 조회수에 민감해지면서 내가 좋아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남 좋으라고 필요 이상의 과장까지 서슴치 않게 된다. 아무리 현실세계라고 할지라도 가상세계와 나누어 살 수 없는 시대가 된 까닭이다. 어쨋거나 현실과 가상의 공존 속에서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구별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혼동 속에서 살고 있다. 도인무몽(道人無夢)이라고 했던가. 건강한 사람은 가상세계에 지나치게 경도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리라.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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