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몰라야 하는 통일, 그리고 흡수통일의 그늘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대한민국의 개천절인 10월 3일은 독일의 통일기념일이기도 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 11월 9일의 일이었지만, 분단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동서독 간 협상 테이블은 오랜 시간을 요했다. 동독 인민의회의 서독편입 결정에 따라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독일의 통일이 선포됐을 때 전 세계는 냉전의 종식을 기뻐하며 이날을 기념하고 축하했다.
당시 통일 독일을 바라보는 동독 사람들의 미묘한 시선과 입장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볼프강 베커 감독의 영화 ‘굿바이 레닌’은 아직 통일이 염원이자 숙제요, 머나먼 미래의 일로 내버려 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시한다.
효도는 어려워
열렬한 공산당원인 교사 크리스티아네는 서독으로 망명한 남편으로 당에 더욱 매달리지만, 베를린 장벽 철거 시위대에서 아들 알렉스를 발견하곤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알렉스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잘못된 것을 자책하며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를 돌보고, 8개월 뒤 기적적으로 크리스티아네가 깨어난다.
어머니가 잠든 8개월 사이, 사회주의 동독은 서독에 흡수통일 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난 어머니는 심장이 너무 약해 약간의 충격에도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 알렉스는 어머니에게 통일 사실을 숨기고 본격적인 거짓말을 꾸며내기 시작한다.
영화 제목과 같이 철거되는 레닌 동상의 풍경에서 동독을 지탱해왔던 많은 것들이 송두리째 뽑혀나가고, 그 자리를 순식간에 메우는 자본주의의 물결을 통해 독일 통일의 명암이 선연히 드러나게 된다. 사진 = 영화 '굿바이 레닌' 스틸 컷
원본보기 아이콘막을 수 없는 자본주의
그러나 통일 이후 밀려드는 자본주의 물결 앞에 동독의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 철거된 레닌 동상만큼이나 식료품에서부터 상점까지 동독의 ‘것’은 빠르게 다국적 기업의 제품과 브랜드에 점령당한다. 알렉스는 쓰레기통을 뒤져 식료품 통을 구해 새 물건을 채워 넣고 급기야는 뉴스도 직접 제작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이 우스꽝스러운 거짓말의 연속은 그 웃음의 크기가 커질수록 통일의 그늘을 반증한다.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동독 사회와 국민의 삶은 휴지조각이 된 돈에서부터 당장 실직자가 되어 버거킹에 아르바이트로 취직하는 누나의 모습까지 사회의 비주류로 서서히 떠밀려 간다.
가족, 그러나 어색한
어머니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통일 후 알렉스는 자연히 통일 전 서독으로 망명한 아버지를 찾아 해후하지만, 관계는 서먹하고 혼란스러울 뿐. 마지막을 앞둔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가 가족이 마주하는 순간의 미묘한 긴장감은 분단이 만들어낸 수많은 상흔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알렉스는 어머니에게 펼친 거짓말의 끝을 서독이 동독에 흡수통일 되는 것으로 매조지한다. 마침 어머니의 장례식은 독일 통일 선언의 날. 나뉘었던 땅이 다시 합쳐지고, 흩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며, 갈라진 문화와 제도 전반의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도 그 이물감은 극복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상처이자 감내해야 할 숙명이다.
분단 63년, 북한의 주민을 향한 지난 1일 박 대통령의 탈북 권유 발언에 오늘 북한은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통해 “‘탈북’을 선동하는 미친 나발질도 서슴지 않았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접경지대 인근 북한 주민들 사이에선 올해 초 큰 인기를 끈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CD로 거래될 정도로 한국 문화를 접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장마당에서도 심심찮게 한국 상품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탈북이 아닌 통일에 대한 어떤 고민과 준비를 해야 할까. ‘굿바이 레닌’ 속 알렉스만큼의 무모하지만 유쾌한 행보가 이미 통일을 이뤄낸 독일에 대한 부러움의 거울로 오늘을 비추고 있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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