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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춤으로 노래하는 발레리나 김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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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오를란도 핀토 파쵸' 특별 출연

볼쇼이 발레학교·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
발레계 아카데미 상·'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
내년 데뷔 20주년 "오랜 시간이 주는 감동, 제대로 공유하고파"


[인터뷰] 춤으로 노래하는 발레리나 김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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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너 나랑 같이 러시아 갈래?" 1990년 어느 봄날, 갈리나 쿠즈네초바 선생(당시 65세)이 선화예중 학생 김주원(39)에게 물었다. 당시 쿠즈네초바 선생은 모스크바 국립무용아카데미(Moscow State Academy of Choreography; 볼쇼이발레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해 3월 28일부터 4월 3일까지 볼쇼이 발레단이 서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백조의 호수'를 공연했다.
쿠즈네초바 선생은 발레 특강을 하면서 김주원을 눈여겨보았다. 김주원은 믿어지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반 년 동안 부모를 설득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모스크바로 갔다. "'고개를 내젓던' 부모님도 200년 역사를 쌓으며 정교하게 다듬어진 교육 시스템을 보곤 셋째 딸을 그대로 두고 가셨어요."

당시 모스크바는 공산주의 소련의 수도였다. 학생 500명이 전화기 한 대를 쓰고 화장실이나 기숙사 문을 잠그는 장치도 없었다. 열다섯 살 소녀가 견디기 어려운 환경. "스카우트돼서 왔으니 난 잘할거야"하고 생각한 자신감은 '착각'이었다. 기본기가 부족했다. "실력에 따라 연습할 자리가 정해졌어요. 제 자리는 디귿자 모양으로 된 바(bar)의 가장 끝자리였죠. 더 서러웠던 건 마리나 레오노바(65) 담임 선생님(현재 볼쇼이발레아카데미 교장)의 눈을 볼 수 없다는 거였어요."

밤마다 울기를 한 달째,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밥 먹고 빨래한 뒤 2층 홀에 가 연습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가 오후 10시쯤 또 홀로 갔다. "바의 가장자리에서 한 칸 한 칸 옮겨갔고 마침내 선생님의 눈을 마주볼 수 있는 중심에 섰어요." 목욕탕에서 쓰러져 앞니가 부러진 적이 있을 만큼 열심이던 김주원은 결국 1997년 우등으로 졸업한다.
오를란도 핀토 파쵸 공연 중인 김주원(사진=국립오페라단 제공)

오를란도 핀토 파쵸 공연 중인 김주원(사진=국립오페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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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볼쇼이발레단에 입단할 줄 알았다. 하지만 '국적'이 문제였다. "난 결국 이방인이었구나, 큰 상처를 받았어요. 마침 최태지(57) 단장님이 주역으로 오라셔서 국립발레단과 인연을 맺게 됐죠." 김주원은 1998년 '해적'으로 국립발레단에 데뷔했고 15년 동안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 '지젤' 등 대부분의 레퍼토리를 섭렵한 뒤 2012년 퇴단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서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을 비롯해 다양한 단체와 일하고 있다.

발레리나 김주원을 지난 18일 오후 5시30분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가늘고 긴 목덜미, 꼿꼿하게 세운 허리. 뒷모습만 봐도 한 눈에 '발레리나구나'하고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두 시간 뒤에 있을 국립오페라단의 '오를란도 핀토 파쵸' 특별 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흘간의 일정이 끝나면 22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대한민국발레축제' 무대 리허설에 참여한다. 퇴단 뒤 잠잠해지는 여느 발레리나들과는 다르다. "발레리나는 자생력이 없어요. 틀 안에 있어야 큰 작품을 할 수 있고 밖으로 나오면 사라지기 쉽죠. 그게 싫더라고요."

'무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김주원은 2010년 뮤지컬 '컨택트'의 주연을 꿰차더니 제4회 뮤지컬 어워즈 여우신인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팬텀'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오를란도 핀토 파쵸'는 첫 오페라 도전작. 그의 몫은 노래가 아닌 연기와 춤이지만 늘 주역만 꿰차던 최정상 발레리나가 다른 장르의 조연으로 5~10분 무대에 서는 것은 그리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용기가 필요하긴 했지만 발레는 종합예술이에요. 자연스레 음악과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됐고 발레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나를 표현해보고 싶었죠. 게다가 뮤지컬과 오페라 가수들의 노하우를 배우며 제 춤도 더욱 풍부해져요." 그는 "20년 가까이 나를 보러오는 관객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건 내 춤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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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데뷔 20주년이다. 그리고 불혹이다. 그가 장르를 오가며 발레를 선보이는 데는 '발레 대중화'라는 목표가 숨어있기도 하다. 김주원은 "내 자신뿐 아니라 조금 더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했다. "두 달 동안 목숨 걸고 연습했는데 후배들이 빈 객석 앞에서 춤 춘다면 너무 슬프잖아요. 언어 없이 몸으로 표현하는 발레를 통해 관객도 위로받을 수 있고…. 함께 나눴으면 좋겠어요."

김주원의 활발한 활동은 국내 관객에겐 행운이다. 뛰어난 발레리나의 춤을 이토록 가까이서, 자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니. 그는 국내 무대에서 활동하면서도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발레리나다. 2006년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이 그의 실력을 말해준다. '브누아 드 라 당스'는 1991년에 발레 개혁자 장 조르주 노베르(Jean-Georges Noverre)를 기리기 위해 국제무용협회 러시아 본부에서 제정한 상이다.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릴 만큼 권위가 있다. 강수진(49) 국립발레단장도 1999년 이 상을 받았다. 전 세계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들 모두가 심사 대상이다.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은 뒤 영국 로열 발레단, 헝가리 발레단 등 유수의 단체에서 함께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는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한국 관객의 박수와 사랑으로 큰 발레리나라고 생각했고 '이렇게 모두가 나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에 대한 매력도 있었고." 그는 '어디에서 춤 추는지 보다 어떤 춤을 추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 직전 8개월간의 부상 역시 국내 무대에 더욱 많은 애착을 갖게 했다. 척추, 허리, 골반, 무릎 성한 곳이 없었다. 2005년 12월 '호두까기 인형' 무대에 올랐을 때는 한 치수 큰 토슈즈를 사 옆을 찢어 신어야 할 정도로 발이 부어 있었다. '토슈즈 신는 게 꿈이 되어 버린 발레리나'. 하루 열두 시간 재활에 매달린 결과 다시 무대에 섰다.

김주원은 스스로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예술가'라 말한다. "일해보고 싶은 안무가가 많고, 새로 관심 가는 분야도 생길 것 같다. 때때로 표현하고자 하는 라인과 느낌을 못해낼 때도 있다"고 한다. 욕심많은 이 여자. "발레라는 순수예술은 와인처럼 오랜 시간 숙성돼 나오죠. 열살에 시작해 열여덟에 발레단에 들어가고 서른 즈음에 제대로 된 춤을 출 수 있는…. 그 오랜 시간이 주는 감동은 분명히 있어요. 그것을 제대로, 더 많이 나누고 싶어요."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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