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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과 김영란, 그리고 '코마와 사망의 중립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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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시아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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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효진 기자] "현대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심장박동 중단과 호흡기능 정지를 기준으로 삼던 기존의 사망 판정이 모호해지고 코마(의식불명)와 사망 사이의 중립지대가 열린 것이다."
김영란(59ㆍ사진) 전 대법관은 지난 달 펴낸 저서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창비)'에서 연명치료 중단 또는 존엄사 논의의 배경을 이렇게 분석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9년 이른바 '김 할머니 사건'으로 불리던 '연명치료 장치제거 청구소송'에서 대법관 9(제거 허용)대 4(불허) 의견으로 '김 할머니 연명치료 중단' 판결을 내려 '존엄사 합법화 논의'의 길을 열었다. 김 전 대법관은 '허용' 의견을 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멈추고 존엄사를 가능케 하는 '웰다잉 법(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지난 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하면서 대법원의 옛 판결, 특히 김 전 대법관의 저서에 새삼 눈길이 모인다.
김 전 대법관은 저서에서 자신이 대법관으로 재직할 때 맡았던(혹은 참여했던) 사건 중 '10대 사건'을 추려 다양한 관점으로 고찰했다. 김 전 대법관이 저서의 첫 장에 배치한 주제가 바로 '김 할머니 사건', 즉 존엄사 문제다.

김 전 대법관은 푸꼬와 아감벤의 통찰을 단초로 사건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근대의 정치를 '생명정치'라는 틀로 분석한 푸꼬의 통찰을 심화시킨 아감벤은 주권자가 권력으로 포섭할 수 있는 테두리의 바깥에 놓인 자를 일컫는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제시"했고, 호모 사케르의 일례가 코마 상태의 환자라는 것이다.

의술이 발달하면서 호모 사케르는 점점 더많아졌고, 이들이 속한 '코마와 사망 사이의 중립지대' 역시 갈수록 넓어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 전 대법관은 "이에 따라 많은 환자들은 제한된 시간에만 가족들의 방문이 가능한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단 채 길게는 십수년, 짧아도 몇 개월 동안 죽음의 과정을 치러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할머니 사건'의 쟁점도 이런 고민에 닿아 있다. 당시 대법관들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원했다"는 김 할머니 가족의 주장을 출발점 삼아 ▲헌법상 자기결정권 ▲김 할머니의 현재 의학적 상태 ▲치료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불과한 지 여부 ▲생명 보호 의무 ▲연명치료 중단은 의학적으로 대체 어느 시점에 시작해야 하는 지 등의 논제를 치열하게 토론했다.

김 전 대법관은 '김 할머니 사건'을 "우리나라 최초로 환자와 가족에게 '품위있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인정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김 전 대법관은 그러나 당시 판결이 "'존엄하고 안락하게 죽을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인정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이 운명을 정할 권리의 맞은편에는 개인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입장'을 넘어 존엄사라는 권리를 행사하거나 행사토록 하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환자가 유효한 수준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김 전 대법관은 이를 설명하는 실례로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을 든다.

이 사건은 뇌출혈로 수술을 받은 환자의 처가 퇴원을 강하게 요구해 병원 측이 이에 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사망한 사건이다. 환자의 처에게는 살인죄가, 의료진에게는 살인방조죄가 적용됐다.

김 전 대법관은 "환자의 유효한 자기결정권 행사가 없었음에도 치료를 중단하고 가족들이 경제적 부담을 빌미로 환자의 의사에 반해 퇴원을 강행한 데 의료진이 응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대법관은 그러면서 "(김 할머니 사건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죽음의 단계에 들어선 환자에 대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결정, 즉 좁은 의미의 존엄사에 대한 것이었을 뿐, 환자의 고통을 덜기 위해 죽음을 앞당기는 일반적인 의미의 안락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부연했다.

그는 또 "김 할머니 사건의 유일한 교훈은 개개인이 자신의 생명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미리 분명하게 의사표시를 해둬야 한다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웰다잉 법'의 핵심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한 환자의 범주를 '회생 가능성이 없고 원인치료에 반응하지 않으며 급속도로 임종 단계에 접어든 임종기 환자'로 명시해 존엄사의 법ㆍ제도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임종기에 접어들었는지에 대한 결정은 의사 2인 이상의 판단을 거치도록 한다.

원칙적으로는 임종기에 접어들면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는 의사를 밝힌 환자가 대상이다.

임종기 환자가 의식이 없을 때나 의사를 추정할 수조차 없을 때는 가족의 합의된 의사 등을 기준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했다.

존엄사가 입법화 최종 단계에 올라선 건 대법원의 '김 할머니 사건' 판결이 나오고 이에 기반해 관련 법안이 발의된 지 약 6년 만이다.



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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