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먹으면 나라도 파는 보이지 않는 '금융의 손' 추적...이시백 장편소설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이 소설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쓰였으며, 대한민국의 어떠한 특정 사실이나 인물과도 무관함을 밝혀 둔다. 다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까멜리아 방언을 한국 사투리로 옮겨 썼다."
소설 '검은 머리의 외국인'의 첫 머리에서 이시백(59) 작가는 이 작품이 허구임을 명백히 밝혀놓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 속 가상의 까멜리아 공화국은 대한민국이며, 까멜리아 은행을 미국 사모펀드인 유니온 페어가 인수하는 사건은 현재도 진행 중인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빗대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얼마 전까지 계좌 이체란 것도 하지 못했다"는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난생 처음 접하는 금융의 오만 가지 복잡다단한 용어와 수법들을 공부하느라 머리털이 하얗게 셀 지경"이었다고 고백한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는 2003년 외환은행을 사들이고 2012년에 이를 되팔면서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배당금과 매각 대금 등으로 론스타가 한국에서 챙긴 수익만 4조7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론스타는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먹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국 정부 때문에 충분히 돈을 벌지 못했다며 투자자-국가간 소송(ISD)을 제기한 상태다. 지난 15일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사건은 소송 가액만 5조원이 넘는다. 한국 정부가 재판에서 지면 5조원이란 돈이 고스란히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머리의 외국인'은 외국인 투자자로 가장한 내국인 투자자를 일컫는다. 당시 외환은행 매입 당시 동원된 달러의 주인들이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면? 그것도 경제 정책을 좌우하는 고위 관료들과 거대 로펌이 론스타 사건의 배후에 있다면? 작품은 '당시 외환은행이 해외기업에 넘겨야할 정도로 부실 상태가 아니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며, 이 같은 추리를 전개해나간다. "돈 몇 푼 얻어먹겠다고 멀쩡한 제 나라 은행을 투기꾼들에게 팔아넘기진 않아요"라는 주인공의 말에 돌아온 대답은 이 작품의 메시지와도 같다. "돈에도 조국이 있나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들이 움직이는 거라네. 은행 하나 팔아넘기는 거? 그건 아무것도 아냐. 마음만 먹으면 나라도 팔아 치울 수 있는 손들이 있어. 어릴 때 돼지 한 마리를 길렀지. 아버지께서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 입학금으로 쓴다고 기른 거야. 내가 매일 밥을 주고, 옥수숫대도 잘라 주었더니 조그맣던 돼지 새끼가 삼년 후엔 엄청나게 커졌어. 새끼 때는 우리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내다 팔려는데 몸집이 커진 돼지가 문으로 나올 수가 없는 거야. 어떻게 했겠나? 문을 뜯어낼 수밖에 없었지. 지금 그 문을 뜯어고치는 거야. 자산 가치? 법? 그건 뜯어고치면 되는 거야. 그게 금융이라는 돼지를 잡는 법이야."(162페이지)
작가는 이 작품을 쓰면서 어린 시절 소풍을 갔다가 야바위꾼에게 용돈과 도시락을 모두 털린 일이 불현듯 기억났다고 한다. "금융이라는 것이 이렇게 복잡하고 다단한 게 나와 같은 어수룩한 사람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철옹성을 쌓고, 그 안에서 화투짝으로 사과와 김밥을 홀려 대는 야바위를 하기 위함이라는 생각마저 하게 됐다"는 게 작가의 고백이다. 론스타와 우리 정부의 소송은 이제 막 시작됐다. 작품을 읽고 나서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까닭은 소설이 소설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머리 외국인 / 이시백 / 레디앙 / 1만4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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