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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흥남부두와 금순이(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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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들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 날이 오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추어보자


굳세어라 금순아 / 현인 노래,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6.25 때 유행했던 이 노래는 ‘실감지수’ 100의 피눈물나는 현실이었다. 국제시장 장사치기(장사치)가 된 사내는 피란 때 흥남부두에서 잃어버린 애인 금순이를 찾아헤맨다. 국제시장은 부산에 있고 흥남은 2005년에 지명이 사라졌지만 함경남도 함흥의 남동쪽 12km에 있다. 한반도 지도로 보자면, 흥남은 호랑이의 뒷목 부근인 동해안의 부두이다. 어찌 하여 이 사내는 흥남에서 배를 타고 부산까지 왔던가. 당시 피란 가는 가난한 민간인을 태울 배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때 상황으로 가보자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차갑던 흥남부두는 1950년 12월23일 상황이다. 1.4 이후 나 홀로 왔다는 건, 마침 화장실엔가 갔을 금순이 손을 놔버리고, 밀려 내려오는 중공군에 쫓긴 후퇴의 대열에 끼어, 혼자 내려와 버렸다는 얘기다.

그해 유월 이후 남쪽으로 밀려내려가 부산 근방까지 후퇴했던 유엔군과 국군은 석달 만인 9월 15일 맥아더원수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승기를 잡는다. 이에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가 38선을 돌파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통일을 코 앞에 둔 때에 북측에서 중공군이 합세하여 인해전술로 대반격을 함으로써 다시 전세가 뒤집힌다. 워낙 남하 속도가 빨라서 적군이 먼저 내려와 남쪽 후방을 차단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맥아더 사령부는 퇴로가 막힌 유엔군과 국군을 흥남 항구에서 동해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것이 50년 12월12일이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미군 수송선은 193척이었으며, 미 10군단과 한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등 병력 10만5천명이 이 배를 타고 남하했다. 차량 1만7500대, 연료 2만9000드럼, 탄약 9000톤 등 장비 35만톤도 함께 수송했다.
그런데 이때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로 불리게 된 28세의 한국인 군의관 한 사람이 있었다. 2007년 11월 25일 타계한 현봉학 박사가 그분이다. 그는 당시의 미10군 단장인 알몬드 장군과 미국 상선인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의 선장인 레너드 라루 선장(2001년 타계)을 열흘에 걸쳐 집요하게 설득하여,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을 수송하도록 한다. 그는 알몬드 장군(당시 소장)의 통역관이 됐다. 어떻게 그런 중요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현박사는 자서전에서 이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알몬드 ; 당신 그 유창한 영어 어디서 배웠어요?
현봉학 ; 네! 버지니아 리치몬드의 의대에서 배웠읍니다.
알몬드 ; 뭐요? 거긴 나의 고향인데? 그럼 당신 고향은 어디에요?
현봉학 ; 네! 군단장님이 주둔하고 계신 함흥입니다.
알몬드 ; 남의 나라에 와서 전쟁 중에 고향 악센트를 쓰는 청년을 만나다니.
이런 인연으로 '장군의 고향 말 쓰는' 현봉학은 10군단의 문관으로 보직 발령이 났다. 나중에 알몬드는 현봉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어쩌면 98,000명의 사람을 구하라는 특명을 받고 이 세상에 왔는지도 모르겠군."

화물선이었던(탑승 정원은 47명이었다는 얘기도 있다)의 메레디스호의 최대 탑승 가능 인원은 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려 1만4천명을 태웠다. 몰려드는 사람을 태우는 시간만도 13시간 40분이 걸렸다. 올라타면 살고 못 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배로 오르는 밧줄을 잡았다. 대롱대롱 매달리고 젖먹던 힘을 다해 기어 올랐다. 한국말을 모르는 미군들은 오직 한 가지 말만 했다. “빨리 빨리!” 영하 30도의 혹한에 눈보라까지 들이쳤다. 승선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부두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마침내 탄 사람과 남은 사람의 운명이 갈라진다. 콩나물시루 배는 23일 오전11시에 출항했다. 거제도 장승포 항에 정박한 것은 크리스마스인 25일 낮 12시42분이었다. 이 무리 속에 금순이 애인도 끼어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배가 떠난 뒤 흥남부두는 미군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그곳에 있던 군수물자 생산 시설들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라루 선장은 1960년 이런 발언을 했다. “10년 전 크리스마스 때 지구 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이로운 항해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사흘 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항해했다고 나는 믿는다.” 항해 동안 그 많은 피란민 중에서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메레디스호는 최다 인명 구출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오히려 5인의 새 생명이 탄생했다. 오늘자 중앙일보(2009.12.25)는 이 배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이경필씨의 사연을 싣고 있다. 그는 미군들에게서 ‘김치 파이브(5)’로 불렸다. 다섯 번째 태어난 김치라는 의미로 말이다. 성탄절날 그토록 위태로운 고난 속에서 태어났으니, 그에게는 이날이 더할 나위없는 축복의 날이리라. 한편 이날 KBS2의 ‘스펀지’에서도 메레디스 호의 크리스마스 기적에 대해 다뤘다.

다시 ‘굳세어라 금순아’로 돌아가자.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떠나온 사내는 영도다리 난간에 뜬 초생달을 보며 애인을 생각한다. 거기서 일가친척 모두 잃어버린 금순이는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그에게 주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굳세어달라’는 막연하고 막연한 부탁 뿐이다. 생을 포기하지 말고, 만남을 포기하지 말고, 통일되는 날까지 기다려만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란 사람이 60년 세월을 넘겼으니, 금순이는 이제 살아 있다 해도 호호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현인은 어떻게 이 노래를 불렀을까. 현씨가 그리 흔한 성도 아닌데, 흥남 쉰들러인 현봉학씨와 흥남 금순이를 노래한 현인이 동씨(同氏)인 것이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현인은 그러나 부산 구포에서 태어난(1919년생) 사람으로 일제 말에 일본으로 건너가 우에노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태양’이란 악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해방 뒤인 1946년에 귀국해 악단 활동을 했는데 이 무렵 작곡가 박시춘을 만나서 가수로 데뷔한다. 한편 작사가 강사랑은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부산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도다리 옆 항구다방에서 파이프를 물고 서 있다가, 배에 씌어진 ‘금순’이라는 낙서를 보고 착상이 떠올라 이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금순이라고 씌어진 그 낙서의 실제인물은 ‘조금순’이라고 한다. 강사랑은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문예부장으로 있던 옛 친구 박시춘을 찾아가 더부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에게 이 노랫말을 전해준다. 박시춘은 크게 감명을 받아 레코드사 2층의 다방에 앉아 바로 작곡을 했다고 한다. 마침 자정이 넘어버렸는데, 가수 현인을 불러 군용담요로 겹겹이 가리고 이 노래를 녹음했다. 모두 전해지는 얘기들이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전쟁통에 만들어지고 불린 노래의 숨찬 탄생 배경을 증언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비슷한 사연을 읊은 것으로 '흥남부두'라는 노래도 있다.

흥남부두 울며떠난 눈보라 치던 그날 밤
내 자식 내 아내 잃고 나만 외로이
한이 맺혀 설움이 맺혀 남한땅에 왔건만
부산항구 갈매기의 노래소리 슬프고나
영도다리 난간 아래에서 누구를 기다리나
동아극장 그림같은 피눈물 젖은 고향꿈
내 동리 물방아 도는 마을 언덕에
양떼 몰며 송아지 몰며 버들피리 불었소
농토까지 빼앗기고 이천리길 배를 곯고
남포동을 헤매도는 이 밤도 비가 온다


흥남 부두/남수련


가만히 이 기구하고 절절한 노래를 읊조리며, 우리 삶의 뿌리와 처연했던 행로를 돌이켜보는 어느 눈보라의 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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