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팔 여자가 아니지. 여기저기 땅을 사 모으고 있단 이야기도 들리던데....’
염소 수염 사내의 흘리듯 지나가는 그 말이 이상하게 하림의 뇌리에 가시처럼 걸렸다.
그건 지난 번 동철이랑 동묘 앞에서 봤던 윤여사의 이미지랑은 사뭇 다른 뉘앙스를 지닌 말이었다. 그때 그녀는 순진하다면 순진하게 보였고, 모자란다면 모자라게 보이는, 약간 자랑끼와 허풍끼가 섞여 있는 푼수로만 비쳤는데, 아까 운학의 말도 그렇고 지금 사내의 말도 그렇고 그건 겉보기일 뿐, 뭔가 복잡한 속내를 지닌 깍정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어슴푸레하게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까 운학이는 한때 사랑했다는 그녀에 대해 ‘속물’이라고 잘라 말하지 않았던가.
하림은 점점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흔들며,
“커피 드실래요?”
하고 말했다.
“좋죠. 이왕이면 난 곱빼기로 주쇼.”
사내가 짐짓 우스개 삼아 말했다. 운학은 사내가 일을 끝낼 동안 지켜볼 요량인지 그새 아예 다리 하나가 부셔진 의자를 옆에 갖다놓고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난 남아있는 술 있음 한잔 주면 좋겠수만.”
현관으로 들어가는 하림의 등짝을 향해 운학이 비굴한 웃음을 달며 말했다. 방에 들어온 하림은 커피물을 올려놓고 박스를 뒤져 소주 팩을 하나 꺼내었다. 비상시에 자기 먹으려고 가져온 것인데 운학은 단입에 다 마셔치울 작정이나 하고 있는 성 싶었다.
‘에이, 그래봤자 얼마나 되겄나. 있다 하소연이 수퍼에 가서 또 사면 되지, 뭐.’
하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쟁반에다 아까 먹던 김 조각과 소주팩을 담고, 커피 봉지 두 개를 뜯어 사내 주문대로 양이 많이 되게 사발에다 커피를 탔다. 커피를 타며 생각했다.사실 운학의 말은 들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못 오를 나무에 침이나 뱉고 보자는 심보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만, 남자라고 별로 다를 것은 없을 터였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사내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에게도 그런 사연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하림의 귀에는 그의 말이 상당히 객관성이 있게 들렸기 때문이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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