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의 과거와 현재가 살아 움직이는 <광해>
그러나 <광해>에서 그는 자신의 특기를 이내 접어 둔다. 임금님보다 왕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광해를 대신한 하선은 지난 10여년간 이병헌이 쌓아 온 그의 방식을 정면에서 배반하는 인물이다.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고 음란한 농담을 주워섬기는 광대의 모습에서부터 식탐을 감추지 않으며, 심지어 생리현상에 충실한 그의 모습은 낯설도록 여유롭다. 스스로는 “SBS <해피투게더>에서 바보스러울 만큼 백치미 흐르는 캐릭터를”연기 한 적 있다고 세간의 놀라움에 의아함을 표하지만, 그의 연기는 결코 고루한 방식의 반복 재생이 아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 인물을 표현하며, 객석은 그가 보여주는 대로 믿으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것은 꼭 넘치지 않을 만큼 하선에게 더해진 우아함 덕분이었다. 의심의 여지없는 백성에게 왕의 자질에 대한 의혹을 품지 않게 된 것은 완벽한 광대의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자신만의 광대를 만들어 낸 배우의 힘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재에서나 진행에서나 유사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쉬운 약점을 가진 <광해>가 지금의 몰입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야기의 거의 전부나 다름없는 하선의 마음이 객석에 온전히 전달된 덕분이다.
‘다음 작품’은 없다, 언제나 ‘새 작품’만이 있을 뿐
그래서 <광해>는 영화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멜로의 법칙으로 소구하는 작품이다. 중전은 물론, 궁의 인물들을 순식간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가는 하선에게서는 치밀함이나 약삭빠른 기운을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듣고 싶어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하선은 대부분의 인물과 짧은 로맨스를 나누듯 교감하고 가까워진다. 드디어 무거운 고뇌의 그늘을 내려놓고 울고 웃는 가장 보통의 감정을 나누게 된 이병헌이 관객과 만나는 순간 역시 다르지 않다. 작품 선택에 전략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그에게 적절한 ‘다음 작품’은 없으며, 언제나 그에게 영화란 ‘새 작품’의 얼굴로 찾아온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에게 빠져들 듯, 이병헌은 출발선에서부터 작품과 인물을 입어낸다. 그의 지난 영화와, 지난 영화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극장 안에서 힘을 잃는다. 오직 영화 속의 이병헌만이 관객을 만나고, 설득하고, 사로잡을 뿐이다. 용상에 오른 광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것은 결국 왕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니라 광대의 진심 때문이었다. 이 멜로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은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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