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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⑤]명정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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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⑤]명정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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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명정 40년/ 변영로 지음/ 범우사/ 3900원

'명정(酩酊) 40년'이란다. 명정.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했다는 뜻이다.
이 책엔 시인이자 수필가인 저자가 삶을 얼마나 유쾌하게 살았는지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물론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얘기다. 술에 흠뻑 젖어 길에서 잠들거나 다쳐서 들어오기 일쑤인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했으랴.

변영로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명정 40년'에 이렇게 썼다. '17세의 신부, 그는 내 생의 반려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의 술 시중꾼 노릇을 끝까지 하였다는 것으로 술에 대한 고생은 장래를 점이나 치는 것인 듯이 첫날밤부터 시작되었다.'

변영로의 표현대로라면 첫날밤도 치르기 전에 '흥숭망숭' 술이 대취해 비틀 걸음을 치며 처갓집으로 들어갔던 그다. 그는 첫날밤을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고 했다.
'신부의 낙망은 어떠하였을 것이며 그 집 일가의 경악은 어떠하였을 것인가. 나는 거의 새벽이 되도록 신부의 옷을 벗길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아아, 슬프다, 되걸을 수 없는 인생의 길이여'라는 대목이 그의 심정을 잘 말해준다.

'명정 40년'엔 놀랄 만한 일화들도 많다. 6살 때 학교에 입학했지만 술 때문에 학교에 잘 안 나갔다는 이야기나 술에 취해 동네 촌부에게 와락 달려들었다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술에 취해 집에 와서는 적삼과 중의를 홀딱 벗어 버리고 앞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을 춘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술을 잔뜩 마신 다음날 남의 집 김치 저장고에 볼 일을 봤다고 했을 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던 그가 하루는 금주를 선언했다. 수십 년 동안 매일같이 술을 마셔왔지만 내심 불안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단연 금주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변영로는 구차한 방안을 생각해냈다. '금주'라고 새긴 은패 하나를 목에 거는 것이었다.

'금주패는 무슨 놈의 금주패야, 개패지' '개가 똥을 끊지, 그자가 술을 끊다니 거짓말이다' 등과 같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 끝내 다시 술을 마시고야 말았지만, 어쨌거나 그는 얼마간 금주에 성공했다.

'한결같이 마시고 마시고 꽃 꺾어 놓고 또 마시다가 마지막 날 도래할 때 장렬한 용사처럼 혼연취사할 뿐이란 것이다'라고 말하는 변영로의 마지막 글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명정 40년'을 마무리 하는 글, '나의 음주변(飮酒辯)'에서 "음주의 변이라고 했지만 음주에 새삼스레 변이 있을리 없다"면서 "청명하니 한 잔, 꽃이 피었으니 한 잔, 마음이 울적하니 한 잔. 이런 구차한 변명을 붙이는 것은 있어 왔으나 엄밀히 말한다면 그네들은 정통 주도는 아닐지 모른다. 나는 낮밤 술만 있으면 마신다"라고 말한다.

이러다 안 좋아할 수가 없다. 변영로와 '명정 40년' 모두 다 말이다. 어쩐지 술 한 잔 하고 싶은 오후다.



성정은 기자 j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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