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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시각]정치의 언어와 詩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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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등 50년째 독자 호응
조롱 막말 뒤덮인 정치권에 경종

"시집 ‘농무’를 내놓고 나서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긴급조치가 내렸다. 많은 친구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거나 또는 구속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신경림 시인(88)이 1975년 3월에 쓴 글이다. 시집 ‘농무’의 맨 뒤 120쪽에 ‘책 뒤에’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시인은 이어서 "그런 가운데서 ‘농무’가 분에 넘치는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고생하는 친구들을 생각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 또한 어쩔 수 없었다"고 썼다.

창비시선 1 '농무'

창비시선 1 '농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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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의 표지에는 ‘창비시선 1’이라고 적혀있다. 창비 시인선 ‘창비시선’은 군사정권의 서슬 퍼렇던 시절에 그렇게 탄생했다. 독재에 맞서야 한다는 거대 담론이 지배하던 시절 시가 과연 저항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싶어 미안한 마음이 앞서던 때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각 출판사의 시인선이 잇달아 출간됐다.

시작은 1974년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였다. 이듬해 창비시선이, 1978년에는 문학과지성사가 ‘문지시인선’이라는 이름으로 시인선을 출간했다. 문지시인선의 첫 시집은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였다. 창비시선과 문지시인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각각 500호와 600호 시선집을 잇달아 발간했고 1주일 간격으로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를 기념했다.


50년 가까이 엄혹한 시대를 견디며 이루어낸 것이기에 결코 의미가 적지 않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로 인해 점점 더 날 선 말과 글이 넘치면서 혼탁해지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두 출판사의 기자간담회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권은 말과 글이 가장 혼탁한 곳이기 때문이다.


시는 군더더기가 될 수 있는 마지막 한 글자까지 없애려는 극도의 절제를 통해 공감을 추구하는 언어적 표현이다. 그렇게 따지면 근본적으로 말의 예술이라고 하는 정치의 언어는 시의 언어와 가장 대척점에 있다. 최근 우리 정치가 극도로 분열된 탓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 게다가 대개 화려한 치장의 말이고 오로지 자신을 위한 언어가 난무한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월 출간한 저서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에서 정치권은 조롱과 멸시를 넘는 거친 막말로 뒤덮여 있고, 상대를 존중하는 예의 바른 태도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고 썼다.

왼쪽부터 창비시선 500 기념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과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왼쪽부터 창비시선 500 기념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과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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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시인선이 잇달아 출간되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수십만권씩 판매되는 시집이 나올 정도로 시 문학이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1만권만 판매돼도 화제를 모을 정도로 시를 읽는 인구가 줄었다. 하지만 기자간담회에서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을 역임한 김사인 시인은 시인선이 500호, 600호씩 발간된다는 자체가 세계에서 드문, 해외 문학 관계자들이 보기에는 황홀해할 일이라고 했다. 또 문학과지성사 이광호 대표는 20~30대의 젊은 독자들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말과 글이 더 혼탁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여전히 존재하니 다행한 일이다. 정치권도 이런 인식을 갖는다면 22대 새 국회에서는 막말의 정치가 좀 줄어들지 않을까.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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