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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임대주택으론 못갑니다" 화마 할퀸 구룡마을 도돌이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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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가보니
이재민들 비상대책본부 텐트에 모여있어
임시 거처 호텔 살고 있지만 "마음 불편"
대안 거처로 임대주택 제시하고 있지만
"여기서 살고 싶어"…"임대료도 걱정돼"

계속 발생하는 재난…재개발은 진척없어
보상 방법 두고 의견차, 갈등 해소 어려워

[아시아경제 황서율 기자]

"이제 그만 집에 갑시다"

"집이 어딨어, 다 불탔는데"


지난 25일 방문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설 연휴 직전 화마가 휩쓸고 간 4지구 화재 현장 한켠으로 ‘구룡마을 화재민 비상대책본부’라는 현수막이 붙어있는 대형 텐트가 눈에 들어왔다. 텐트 안엔 화재로 집을 잃은 이재민 1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날 서울의 체감온도가 영하 25도까지 뚝 떨어졌지만, 이재민들은 텐트 중앙에 설치된 작은 난로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 한 이재민은 "호텔에선 잠만 자고 아침 7시부터 여기에 모여있다"고 전했다.

"여기서 집 짓고 살게 해달라"vs"임대주택으로"
25일 방문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4지구. 새까만 잿더미 주변으로 출입통제 테이프가 둘러져있다/사진=황서율 기자chestnut@

25일 방문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4지구. 새까만 잿더미 주변으로 출입통제 테이프가 둘러져있다/사진=황서율 기자chest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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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발생한 지 5일이 지났지만, 현장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가재도구들과 타다 만 연탄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매캐한 냄새도 채 가시지 않았다. 집으로 이용했던 비닐하우스는 뼈대만 남았고, 여기저기 깨진 유리조각과 철근들이 연신 발에 채였다.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은 강남구청이 임시 거처로 마련해 준 인근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호텔이 기존에 살던 무허가 가건물보다 시설은 더 낫겠지만 이재민들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35년간 구룡마을에서 거주했다는 유모씨는 "환경은 좋지만 내 집이 아니기 때문에 마냥 편하지는 않다"며 "구룡마을은 어쨌든 내 집이 있는 곳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다. 호텔 거주 기간은 일주일 정도지만 이주민들이 원하면 한 주 더 연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재민들이 호텔을 나와 거주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화재가 난 기존 터에 다시 가건물을 지을 수 없고, SH공사가 제공하는 임대주택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이재민들이 꺼린다. 구청 관계자는 "건물이 다 전소된 상태라 새로 건물을 올리는 것을 동의하거나 허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구청은 좀 더 안전한 환경에서 이재민이 지낼 수 있게 SH공사와의 협의를 독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재가 난 구룡마을 4지구에는 뼈대가 드러난 비닐하우스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사진=황서율 기자chestnut@

화재가 난 구룡마을 4지구에는 뼈대가 드러난 비닐하우스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사진=황서율 기자chest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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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마을 주민 400여세대가 이미 임대주택으로 이주한 만큼, 이재민들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것이 SH공사의 방침이지만 현장에서 만난 이재민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재민 김남구씨(65)는 "내 집을 갖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임대로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다른 이재민 역시 "나가서 못 사니까 여기서 살고 싶은 것이다"며 "임대로 사는 것은 구룡마을에서 더 이상 거주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임대료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 이재민은 "임대아파트로 이주한 지인의 말을 들으니 한 달에 최소 20만~30만원의 임대료를 내야 한다"며 "주민 중에는 100만원도 채 못 버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임대권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그대로 살 수 있게 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SH공사는 구청에서 전달받은 화재피해 주민 45가구(62명)를 방문해 안내문을 전달하고 임대주택 제공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SH공사가 제공하는 임대주택으로의 이전을 신청한 이재민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보상 문제'로 10년 넘게 재개발 도돌이표…주민들 요구도 제각각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입구에는 재개발에 따른 임대 보상을 반대하는 현수막들이 붙어있다/사진=황서율 기자chestnut@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입구에는 재개발에 따른 임대 보상을 반대하는 현수막들이 붙어있다/사진=황서율 기자chest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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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마을에서 재난이 발생한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1999년에도 화재로 주민 30여명이 갈 곳을 잃었으며, 2004년에도 20분 만에 가옥 3채가 탔다. 2009년 이후에는 10여 건이 넘는 화재가 발생했다. 다닥다닥 집이 붙어있는 구조상 쉽게 불이 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1년에는 집중호우로 560여개 가옥이 침수됐으며, 지난해 8월 집중호우때도 주택 침수로 1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열악한 환경과 반복되는 화재에도 구룡마을은 보상에 대한 갈등으로 재개발되지 못하고 여전히 판자촌이 만들어진 초기인 1980년대 말에 머물러 있다. 2011년 서울시는 구룡마을을 개발해 2016년까지 아파트 2793가구를 공급하는 공영 개발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시는 기존 거주민이 정착할 수 있는 영구·공공임대 아파트 1250가구도 함께 공급할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주민들에 대한 보상 방식이 ‘분양이냐 임대냐’에 따른 지지부진한 논의 끝에 2014년 개발구역에서 해제됐다.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입구에는 주민자치회, 마을자치회, 토지주·주민협의회 등 각 주민 협의체들의 상이한 주장이 담긴 현수막들이 걸려있다. 사진은 '주민자치회'가 내건 현수막/사진=황서율 기자chestnut@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입구에는 주민자치회, 마을자치회, 토지주·주민협의회 등 각 주민 협의체들의 상이한 주장이 담긴 현수막들이 걸려있다. 사진은 '주민자치회'가 내건 현수막/사진=황서율 기자chest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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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시는 2016년 11월 구룡마을을 도시개발구역으로 다시 지정하고 2020년 6월에는 도시개발사업 실시계획을 인가·고시했다. 당시 계획은 2022년 착공, 2025년 하반기에 사업을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공공임대주택 4000가구를 공급한다는 것도 함께 약속했다. 반복되는 재난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20일 현장을 찾아 "재개발이 해결책"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보상에 대한 의견 차이로 개발은 멈춰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보상 방법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현재 구룡마을에 있는 주민협의체는 3개가 있다. 주민자치회의 경우는 '임대주택 대신 저렴한 평당 택지수용가로 주민들이 이를 매각할 수 있게 하라'는 입장이다. 이후 지역주택조합을 활성화해 주민들이 조합원이 되겠다는 것이다. 반면, 마을자치회와 토지주·주민협의회는 임대 후 분양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SH공사 측은 "법과 규정에 따라 보상을 진행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현재 구룡마을에서 SH공사가 제공한 임대주택으로의 임시 이주 가구는 437가구며, 구청의 최근 통계 집계에 따르면 구룡마을에 현 거주하고 있는 가구 수는 665가구다.




황서율 기자 chest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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