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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규의 야구라는 프리즘]환율이 만든 풍경…줄어든 KBO 재일동포, 늘어난 日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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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초창기 에이스 활약 장명부·김일융 등 재일동포
이적 위해 日보다 고연봉 지급, 플라자 합의 후 엔화 급등
영입 선수 숫자도 기량도 줄어…1995년 후엔 8명에 불과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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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환율 시대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5일 1363원으로 세계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 21일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한국은행 집계에 따르면 1964년 이후 연 단위 환율이 1300원을 넘었던 적은 IMF 사태가 한창이던 1998년 외에는 한 번도 없었다.


환율은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프로 스포츠도 자유로울 수 없다. IMF 사태 직후인 1998년 시즌을 앞두고 프로야구 여덟 구단 가운데 네 구단이 해외 전지훈련을 포기했다. 이듬해 1~3위를 차지한 현대, LG, 삼성은 모두 해외 전훈을 다녀온 팀이었다. 그러자 1999년 시즌을 앞두고 전 구단이 해외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는 일화가 있다.

프로야구가 환율에 가장 영향을 받은 분야를 꼽으라면 재일동포 선수 영입을 들 수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81년 설립 당시 출범 네 번째 시즌인 1985년부터 해외동포 선수를 받아들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프로야구가 성행하고 재일동포가 많은 일본이 주된 타깃이었다. 그런데 원년인 1982년 여섯 구단 실력 차이가 예상보다 크게 나타나자 1983년으로 시행 연도를 앞당겼다. 당시 일본 야구계에선 "한국에 선수를 빼앗긴다"고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첫해엔 재일동포 선수 네 명이 고국 프로야구 무대를 밟았다. 효과는 극적이었다. 원년 승률 0.188이던 삼미는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3위를 차지하며 강호로 떠올랐다. 팀 52승 가운데 30승을 따낸 재일동포 에이스 장명부의 덕이 컸다. 장명부는 1980년 히로시마에서 센트럴리그 승률왕을 따낸 스타 출신이었다. 내야수 이영구도 팀 내 대체선수대비승수(WAR) 6위에 오르며 활약했다.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은 투수 주동식, 포수 김무종 두 재일동포를 받아들인 해태가 차지했다. 이듬해인 1984년엔 삼성, 롯데, OB가 재일동포 선수들에게 문호를 열었다. 삼성 투수 김일융은 16승을 따내며 에이스로 활약했다. 롯데 외야수 홍문종은 122안타로 최다안타 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재일동포 붐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1990년 이후 주전급으로 활약한 재일동포 선수는 세 팀에서 통산 511안타를 때려낸 김실(1994~2000) 그리고 올해 두산의 안권수 정도다. 프로 원년 롯데 기록원으로 프런트 생활을 시작한 김태룡 두산 단장은 "올 만한 선수가 거의 다 왔던 것"이라고 했다.


KBO 총재 특별보좌역이던 장훈은 초창기 재일동포 선수 영입에서 가교역할을 했다.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다인 3085안타 대기록을 보유한 재일동포 출신 슈퍼스타다. 일본 야구계에 영향력이 크고 국적 노출을 꺼리는 재일동포 사정에 밝았다. 한국 프로야구 수준은 출범 이후 지속해서 올라갔지만, 영입 가능한 재일동포 선수 풀은 점점 줄어들었다는 게 김 단장의 설명이다.


환율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니우라 히사오’라는 이름으로 뛰었던 김일융은 명문 요미우리에서 왼손 에이스로 활약했다. 1977년과 1978년엔 2년 연속 평균자책점과 세이브 타이틀을 석권했다. 이건희 당시 삼성 구단주가 일본 인맥을 동원해가며 영입에 공을 들인 스타였다. 1983년 요미우리에서 김일융의 연봉은 1560만엔이었다. 삼성은 요미우리에 이적료 1000만엔을 지급하고 계약금 2000만엔, 연봉 2500만엔의 3년 계약으로 김일융을 영입했다. 일본에서보다 더 높은 연봉을 지급했다.


그런데 계약 기간 중인 1985년 9월 22일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주요 5개국 재무장관이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합의했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이후 엔화 가치는 급등했다. 1985년 100엔은 한화로 368.7원이었다. 이듬해 가치는 526.3원으로, 42.7%나 급등했다. 삼성에서 김일융의 연봉은 엔화로 3년 동안 같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한화로는 1984년 8489만원, 1985년 9218만원, 1986년 1억3157만원이 됐다. 환율 효과로 마지막 해 연봉이 첫해보다 55.0% 인상됐다.


물론 프로야구단 소유주에게 그렇게 큰돈은 아니다. 한국 프로야구 모기업은 소비재 위주인 일본 프로야구보다 훨씬 규모가 크기도 하다. 하지만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 상승이 재일동포 선수에게 한국에서 뛸 동기를 약화한 건 자명했다. 재일동포 선수는 한국 프로야구에 입단하는 순간 핏줄 내력이 노출되는 위험도 떠안는다.


반대로 일본 프로야구에 도전할 동기는 높아졌다.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 ‘버블 경제’ 호황을 구가했다. 프로야구 선수 연봉도 급상승했다. 1980년 최고 연봉은 그해 마지막 시즌을 보낸 ‘홈런왕’ 오 사다하루의 8170만엔이었다. 1984년까지 오의 은퇴 시즌 연봉 기록을 깬 선수는 나오지 않았다. 1985년에야 야마모토 고지가 8500만엔으로 오를 넘어섰다. 1987년에는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최초로 ‘1억엔 선수(1억3000만엔)’가 됐다. 그는 1991년 2억엔, 1992년 3억엔의 벽을 잇달아 넘었다. 전체 선수 평균 연봉도 1980년 602만엔, 1985년 978만엔, 1990년 1527만엔, 1995년 2695만엔으로 급상승했다. 5년 단위로 각각 62.5%, 56.1%, 76.5%씩 증가했다.


한국 프로야구 평균 연봉은 원년 1215만원(413만엔), 1985년 1656만원(424만엔), 1990년 1447만원(294만엔), 1995년 2442만원(296만엔)이었다. 원화 기준으로는 인상됐지만 일본 프로야구 평균 연봉 대비로는 1985년 43.4%에서 1990년 19.3%, 1995년 11.0%로 크게 줄어들었다.


재일동포 영입은 플라자 합의 이후에도 1994년까지 매년 이뤄졌다. 1983년~1988년 6년 동안 입단한 선수는 스물두 명. 하지만 다음 6년 동안엔 아홉 명에 그쳤다. 엔화 가치 상승과 반비례해 커리어와 기량도 크게 떨어졌다. 김일융, 장명부 같은 일본 프로야구 타이틀 홀더 출신은 1986년 신생팀 청보가 서른네 살 노장 김기태를 영입한 게 마지막이었다.


2020년 두산에 입단한 안권수는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NPB가 아닌 일본 독립리그를 거친 케이스다. 그는 1995년 이후 28년 동안 여덟 번째로 등장한 재일동포 선수다. 이 기간 한국은 IMF 사태를 겪었고, 이후 ‘100엔=1000원’은 거의 외환시장의 상식이 됐다.


한국야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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