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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차별 시달린 여성들…지금은 행복할까 [강주희의 영상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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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코로나 시국에도 흥행
남성들 재떨이 비우고 커피 심부름
차별과 편견 시달려…지금은 확 바뀌었을까
전문가 "여성서사 증가, 현실 바꾸는 지표 될 것"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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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강주희 기자] ※ 장면·묘사 등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침 7시5분. 한 여성이 머리를 질끈 묶고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 청소를 시작한다. 먼지가 쌓인 블라인드를 올리고, 침이 묻은 담배로 가득찬 재떨이를 비우고, 책상과 바닥을 쓸고 닦는다. 화분에 물도 준다. 이내 또 다른 여성 직원들과 모여 남자 상사들을 위해 커피를 준비한다. "셋 둘 둘, 둘 둘 넷, 하나 하나 하나…." 직원들은 상사 개개인의 커피, 설탕, 프림 비율도 파악하고 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오프닝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 상고를 졸업하고 대기업인 '삼진그룹'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회사의 비리를 파헤친다는 내용으로, 여성의 연대와 우정을 그리고 있다.

지난 10월21일 개봉한 이 영화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위축된 영화 시장에서도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며 모처럼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90년대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이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과 차별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관객들의 공감과 호응을 얻고 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는 입사 8년 차 동기인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각자의 부서에서 능력 있는 베테랑 직원이지만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회사의 중요한 업무에서는 배제된 채 잡일을 맡아 하고 있다.


남성 직장 상사들과는 달리 자주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회사 내에서도 위계와 질서가 나뉘고 있음을 보여준다. 늦게 들어온 남자 후배는 대리가 되고, 8년을 일했지만 말단 직원인 이들의 모습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임신한 여성에 대한 직장에서의 배제는 더욱 심각하게 그려진다. 극 중 등장하는 총무부 '미스 킴'은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면박을 받고 회사를 떠나게 된다. 이를 본 유나는 "상고 출신이라고 진급도 못 하고 잔심부름만 하다가 사라지겠지…. 총무부 미스킴이 우리 미래야"라고 자조 섞인 한탄을 털어놓는다.


회사 공장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폐수 방류 사고'를 목격한 자영이 이를 폭로하려 검찰을 찾아가지만, 담당 검사는 "담배 좀 사다 줄래요?"라며 고발인 자격으로 온 자영의 말과 행동을 면전에서 무시한다. 검사의 이 한마디에는 고졸 여성이 뭘 알겠냐는 비아냥이 깔려있다.


결국 자영은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과 사회의 편견 앞에서 자괴감에 빠진다. 폐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도 '내가 뭘 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한탄 속에 자신을 까마득한 터널로 밀어 넣는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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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불편한 지점은 더 있다. 상사를 위해 커피를 미리 준비하는 등 90년대 직장에서의 자영의 위치는 십수년이 지난 2020년 지금의 여성들이 직장에서 처한 처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자영이 처한 차별은 영화의 막이 내려지면 끝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직장에서 겪을 수 있는 차별은 말 그대로 현실이다. 끝이 없다.


한 조사 결과 실제 여성이 직장에서 겪는 차별과 배제는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10개 단체가 모인 '3시 STOP 공동행동'이 지난 1월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여성 노동자 404명 중 74%(299명)가 '직장 내에서 성차별적 상황을 마주한 적이 있다'라고 답했다.


복수 응답으로는 '몇 년을 일해도 항상 최저임금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54.5%(220명), '같은 일을 하는 남자보다 내가 임금을 덜 받는 것 같다' 53.5%(216명),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 45.5%(184명), '가장(생계부양자)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 44.1%(178명) 순으로 나타났다.


이 외에도 여성 노동자들은 '직책이 있음에도 여직원, 사모님 등 호칭부터 시작되는 성차별', '컵 씻기나 다과, 화병에 물 주기 등 직장에서도 요구되는 돌봄 노동' 등의 차별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듯,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가 2020년 현재의 여성 관객에게도 큰 공감과 호응을 얻고 있는 점은 여전히 여성이 직장에서 겪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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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해 여성들이 직장에서의 차별을 받는 실태를 고발한 이 영화 산업계 역시 다르지 않다. 상업영화 장르 안에서 여성 캐릭터는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남성 주인공의 조력자 역할을 하는 부수적 캐릭터에 그치는 등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로 그려지지 않아 왔다.


한국 영화의 주연 성비 불균형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 2월 발표한 지난해 실질 개봉작 190편 중 여성이 주연(등장인물 크레디트 첫 번째 혹은 두 번째)으로 등장한 영화는 37.3%(63명)로 집계됐다.


순 제작비 30억 이상의 영화에서 여성 주연은 단 18.6%(8명)에 불과했다. 제작 규모가 커질수록 여성 주연의 비중이 작아졌다. 여성은 영화의 재현에서도 '배제의 대상'이 되었던 셈이다.


전문가는 여성에 대한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됨으로써 현실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여성 서사에 대한 욕망은 최근 몇 년간 일련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여성 운동이 여러 양상으로 일어났고, 실제로 많은 분이 양성평등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며 "현실이 바뀌려면 법적, 제도적으로 변화해야 할 부분이 많겠지만 이런 문화의 힘에 의해서 인식 개선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고, 어떤 캐릭터가 등장하는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며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난 콘텐츠, 또 여성만 등장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약자에 속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해 남녀노소가 보편적으로 다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만들어짐으로써 변화해야 할 현실의 긍정적인 지표가 되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강주희 기자 kjh81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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