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희 시집 얘얘라는 인형=니체는 말했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그런데 다시 니체의 말을 옮기자면 오늘날 ‘고통’은 때로 “위장의 지식”이며 “세련된 교양의 표정”을 짓곤 한다. 정말이지 그렇지 않은가. 이제 ‘고통’은 다만 연민 혹은 극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고통’은 전자의 경우 향락적 스노비즘을 정당화하며, 후자의 경우 성장의 드라마를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고통’은 당연하게도 폐절되고 역설적이게도 은폐된다. 요컨대 우리 세계에서 ‘고통’은 끊임없이 말해지고 있으나 그것 자체로는 현시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손톱에 피가 나도록” “네 이름”들을 호명하는 시인이 있다. 이난희 시인이 그녀다. 이난희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얘얘라는 인형?의 지면 도처에 “귤 상자에서, 컨테이너 옆 담벼락에서, 검은 비닐봉지에서, 공중전화 부스에서, 길바닥에서, 쇼핑백에서, 헌옷수거함에서, 공중화장실에서” “방금 태어나고, 지금 막 버려진” 고통당하는 자들을 호출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고아이거나 입양아이며, 유아 성폭력 피해자이며, 다국적 기업에 노동을 착취당하는 어린아이이며, 가정폭력으로 인해 학대받는 여성이며, 천륜까지 무시할 수밖에 없는 한센인이다.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여행”을 떠난 팽목항의 아이들이며, “죄 없이 쓰러진” “농사꾼 백 씨”다. 그들은 결코 “아무나가 아”니지만 여전히 “얘얘”로 불릴 뿐이다. 그리고 기껏해야 “내가 널, 우리가 널, 지켜 줄게”라는 “명분 없는 말”에 둘러싸인 자들이다. 이난희 시인이 자신을 포함해 이들을 가리켜 “숨어 있는 사람”으로 지칭하거나 “깨어나지 않을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따라서 정당하다. 그들은 우리 세계의 “유령”들이다. 이난희 시인은 그들 스스로 “목구멍 깊숙이 삼켜 버”릴 수밖에 없었던 비명과 신음을 ?얘얘라는 인형?의 행간마다 불러들여 드러낸다. ?얘얘라는 인형?은 한마디로 끝나지 않는 “악몽”이자 ‘절규’다. 이 시집은 한국시에서 고통의 윤리학을 다시 정립할 것이다. (시인 채상우의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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