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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배수연 첫 시집 <조이와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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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 또는 아찔… 박하향 나는 詩

배수연은 2013년에 '문학수첩'이라는 잡지의 신인상을 받아 등단한 시인이다. '조이와의 키스'는 그의 첫 시집이다.

출판사에서는 소개 글에 "박하사탕을 와작 씹었을 때 퍼지는 강렬한 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시인의 글을 해설한 평론가의 글을 인용했으리라. 사실 박하는 맛보다 향이 먼저 폭발한다. 그리고 그 향기는 감각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사고 속으로 스며든다. 그럼으로써 추상화하는 박하 향은, 수용자에 따라 아련한 추억이기도 하고 아찔한 유혹이기도 하고 말 못 할 절망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함축하거나 두서없이 펼쳐놓거나. 박하 향이라…. 아무튼 배수연의 첫 시집에서 젊은 시인의 체취를 강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축농증 환자다.
딱 요즘 같은 계절에, 큰길에서 집으로 가는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어디선가 크고 작은 눈송이와 꽃잎이 뒤엉켜 안경을 낀 얼굴에 마구 쏟아진다. 잠깐 뜸한 틈을 타 안경을 벗고 손수건을 꺼내 낯을 닦은 후 "도대체 어떤 놈이야?" 하며 주위를 살핀다. 아무도 없다 싶을 때 턱밑에서 기척이 들리고, 어린아이가 오른손에 든 꽃과 얼음 범벅을 건넨다. "아저씨도 한번 해보라"며. 아, 곤란하다. 어디다가 던진단 말인가. 받을 수 없다. 뭐라고? '너'한테? 안 될 말이다. 그럴 수 없다. 딱 그 기분으로 '조이와의 키스'를 읽었다.

조이와의 키스

조이와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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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버릇이 있다. 새 시집을 받으면 행운을 점치듯 책갈피를 펼쳐 만나는 첫 시를 공들여 읽는다. 가능하면 그 시는 외우려 노력한다. 배수연의 시집에서 읽은 첫 작품은 '오렌지빛 줄무늬 교복'이다. 출처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정서가 오감을 어지럽게 한다. 또한 시인은 어마어마한 재능과 어찌나 순수한지 관능적이기까지 한 미숙함(또는 낯섦)으로 독자를 한편 짜릿하고 한편 서글픈 시간 속에 빠지게 한다. '오소리 같은 심장' '갈색 소스가 흐르는 싸구려 햄버거' '바짓가랑이 아래로 흐르는 베고니아 똥꼬의 유혹' '커서 엄마가 될지 담임이 될지 알려주지 않는 창문'….

얼핏 날것과 같은 이 느낌이 설령 미숙함이라 할지라도 그 미숙함은 결코 문학적 테크닉의 부족에서 오지는 않는다고 본다. 아마도 정서적 에너지의 과잉, 최후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시인 내면의 그 무엇이 질긴 힘줄처럼 끊어지지 않고 남았기에 불가피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말하려 할 때 우리는 말을 더듬기 일쑤 아니던가. 아니면 완전히 어린애가 돼버리거나. "완전ㆍ최고ㆍ슈퍼ㆍ울트라ㆍ캡숑ㆍ짱이에요!" 시인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시인이 시간의 어떤 부위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거나. 불타버린 메모지에 남은 시인의 필적-살점.
시집을 만나기 전까지 배수연을 몰랐다. 시인은 대학교에서 서양화와 철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철학은 모르겠다. 그저 그의 시를 읽으면서 서양화가들이 유화를 그릴 때 자주 사용하는 몇 가지 기법을 연상하게 되었다. 먼저 임파스토 기법. 물감을 의도적으로 두껍게 칠해 생생한 붓 자국과 물감의 물성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다음은 글레이징 기법. 물감을 묽게 해서 이미 칠한 그림 위에 얇게 덧칠하는 방법이다. 글레이징은 밑그림이 완전히 건조된 다음에 해야 한다. 잘 활용하면 투명하면서도 광택이 나는 채색을 할 수 있지만 물감이 섞이면 탁해진다.

'…우우우우//원숭이들은/밤하늘을 보고 아름다움을 알까/원숭이들은 서로의 목덜미에/불을 가져다 대는 놀라움과 슬픔을 알까//여름밤의 폭죽을 봐/울음이 결국 우주의 먼지가 되는 것을/별들은 폭죽에 눈이 멀어/검은 화약 덩어리가 되었어/너의 목에 떨어진 불덩이를/장마는 처마에서 기다리고//나는 밤새 장마를 받아 적어/아무리 크게 읽어도/너는 빗소리밖에 듣질 못하고//그래도 상관없지…' (여름의 집)

타고난 시인과 학습한 시인이 있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문학과에 진학한 나는 선배들에게 시를 배웠다. 대학을 절반쯤 다녔을 때 이미 등단해 장학금을 받는 천재 시인들이었다. 등단을 하기 전이나 그 뒤로도 나는 배워서 시를 쓰는 시인의 한계를 여러 번 절감했다. 타고난 시인들은, 화가에 비유하자면 메워야 할 곳과 여백으로 남겨야 할 곳을 대번에 안다. 스케치를 여러 장 해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배운 시인은 금속을 세공하는 장인처럼 품을 많이 들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배수연이 어떤 시인인지, 그의 첫 시집만 봐서는 모르겠다. 그리고 내게 시를 가르친 선배들이 배수연의 시를 읽는다면 뭐라고 충고할지 궁금하다.

책날개에 인쇄한 사진(김청수 촬영)을 보니 시인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다른 사진도 찾아보았다. (짐짓) 아련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이 이 시인에게는 없다. 옆얼굴 사진도 있지만 곧 이쪽을 보거나 이미 본 얼굴이다. 표정으로 이쪽과 대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래도 상관없지'라고 시인은 말하지만, 사실은 거듭해서, 점점 소리를 높여 우리에게 읽어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마음속을 적셔가는 저 빗소리, 불꽃과도 같은 울음인 것이다. 사진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이 시인은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속이지 않을 것이요, 혹여 속였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라도 '쌍욕'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요즘 시집을 읽을 때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 대개 평론가가 나서서 시인과 시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반면 시인의 말(글)은 지나칠 정도로 짧아 인색하다고 느낄 정도다. 시인이 지상의 언어를 사용하여 시를 썼을지라도 천국의 소인이 찍혀 있기 일쑤고, 그러므로 신탁(oracle)을 받아 적는 일을 평론가가 맡는 데 불만은 없다. 하지만 세이렌의 노래 같은, 마성의 언어 말고 오디세우스를 꾀는 인간의 언어도 들어보고 싶은데, 독자에게는 그 기회가 없는 것이다. 배수연이 쓴 '시인의 말'도 짧다. '너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쓰다 밤새 흰 뿔이 생겼다/이 예쁜 봉오리 좀 봐!/너는 길고 뾰족하게 입을 맞춘다'.

곤충을 사냥하는 식물, 아니면 그 반대.

huhball@


조이와의 키스
배수연 지음
민음사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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