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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76]강릉발 KTX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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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차게 토하는 기적(汽笛)소리에/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1908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지은 창가(唱歌) '경부철도가' 첫머리입니다. 기차가 바람처럼 달려, 하늘을 나는 새도 따르지 못할 만큼 빠르다는 이야기지요.

무척이나 허풍스런 가사인데, 꼬집기는 어렵습니다. 말(馬) 타고 달리는 것이 최고속도의 '부산행'이던 시절이니까요. 기차의 등장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었겠습니까.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시커먼 쇳덩이는, 어쩌면 무섭기조차 했을 것입니다. 난 데 없는 괴물의 출현에 흰 옷 입은 백성들은 입이 쩍쩍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가 앉아있는 이 탈것의 속도는 무엇에 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서울사람을 동해바닷가에 부려놓는데 두 시간도 걸리지 않은, 11:00발 강릉행 'KTX-산천 830'. 강릉 향교(鄕校)앞 골목에서 저녁을 먹고 길을 나선 사람을, 열시 이전에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달리고 있는, 19:30발 서울행 'KTX 813'.

차창 밖은 칠흑(漆黑)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밤차니까 그렇습니다만, 내려오는 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산과 강과 들판을 지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지요. 오면서 무얼 보았느냐 물으면, 대답이 신통치 않을 것입니다. 눈길을 주는 순간, 풍경은 이미 어디론가 밀려나버리고 없었으니까요.

기차가 멈춰서는 순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하나같이 친숙하고 정겨운 이름들인데, 얼굴이 없습니다. 역명이 다르면 내다뵈는 광경도 달라야 하는데, 모든 정거장 생김새가 똑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다보니, 이 열차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이름 그대로, '교통수단'.
'수단'이란 말에서 서글픈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입니다. '철마(鐵馬)'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오랜 세월 사람과 체온을 나누던 그가 이제 '차가운 기계' 신세가 되어갑니다. '달리는 기계'. 말에 비유하자면, 경마장의 말입니다. 앞만 보고 달립니다. 목표지점만 생각합니다.

빙상경기장의 도시로 가는 길이라서, 더 그렇게 보일까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의 고독한 질주를 보는 것 같아서, '짠한' 생각까지 더해집니다. 이 기차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빨라질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채찍이 이 '경주마'의 기록을 계속 갈아치울 테니까요. 어느 날인가는 '천마(天馬)'등급의 칭호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반도 삼천리'가 삼백리쯤으로 축소되는 기분입니다. 노모(老母)를 업었더니, 새털처럼 가벼워 슬프더라는 효자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부산행이 우리 국토의 신장(身長)을 확인시킨다면, 이 기차는 우리 땅의 허리둘레를 알게 합니다. 속도에 취해, 어머니의 대지가 점점 더 작아집니다.

기차가 '횡성'을 지나 '만종'역에 멈춰 섰습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이 떠오릅니다. '…섬강은 어드메오, 치악은 여기로다.' 횡성에서 바로 이곳 '원주 호저면'으로 흘러드는 강이 '섬강(蟾江)'입니다.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부임해 오던 경로를 묘사한 대목에서 보이는 이름이지요.

길도 하나의 물줄기입니다. 길을 따라 땅기운도 흐르고 사람의 운세도 흐릅니다. 이 열차길이, 거쳐 가는 모든 고을을 두루 적시며 흘러야 하는 까닭입니다. 올림픽의 해에 열린 노선답게 화합과 평등의 길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서울-강릉'을 오가는 비행기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일등열차'가 서는 곳들만 '일등마을'이 되어선 곤란합니다. 기차와 승객과 정거장 모두, 절약된 시간을 어떻게 쓸지를 함께 고민해볼 일입니다. 넉넉해진 시간들이 '버스와 자전거와 운동화'에 고루 나눠진다면 좋을 것입니다. 따라가고 싶은 길들이 많을수록 좋겠지요. 그 길들의 이름은 모두 '이야기 길'입니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길을 늘려가노라면, 국토는 다시 넓어집니다. 올림픽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더라도, 이 열차는 저절로 국제열차가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경부철도가' 2절이 새삼스럽게 여겨집니다. 오늘의 '경강선 KTX'를 위해 준비된 가사 같습니다. 어떤 격차와 갈등과 대립도 없는 평화열차의 정경입니다.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섞여 앉았고/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내외 친소(親疎)(상관없이) 다 함께 알고 지내니/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시간의 축지법으로 생기는 '거리(distance)의 소멸'이 세상 모든 거리감(距離感)을 없애는 마법일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시 한편('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이 던지는 질문도 받아봅니다.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이어지는 답까지 생각해봅니다.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山驛)에서 차를 버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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