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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의 시와 음악의 황홀 속으로 1]킹 그림즌(King Cri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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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Prologue
음악이 거기에 있었다. 음악이 나를 호출한다. 음악이 나를 인도한다. 음악이 나를 흡수한다. 음악은, 지금,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현재를 구현한다. 음악이 손을 내민다. 음악이 가슴을 연다. 음악이 나를 안아준다. 음악이 자신의 전 존재를 우리에게 내어준다. 음악 속으로 들어간다. 음악과 나는 분리를 모른다. 음악과 나는 영원에 다다른다. 음악이 여기에 있다.


1. 킹 그림즌(King Crimson)
나의 목표는
혼돈의 힘을 이용하여 응축된 의지를 해체하고
숨어 있는 아나키를 조직하여
평정을 획득하는 것이다
―Robert Fripp

1969년, 킹 크림즌이 데뷔했다. 48년 전 우리에게 충격적인 전위가 나타났다. 혼돈과 평정이 뒤섞여 있는 이들의 첫 번째 앨범 『크림즌 왕의 궁정에서(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그들은 「21세기 정신분열증 인간(21st Century Schizoid Man)」을 앞세우고, 이전 시대와 단절을 선언하면서, 무정부주의적 미학의 깃발을 게양한다. “죽음의 씨앗 눈먼 자들의 탐욕, 시인들은 굶주리고 아이들은 피흘린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지닐 수 없다, 21세기 정신분열증 인간이여.” 가사가 사라지자 베이스와 드럼이 구축하는 날선 리듬이 결빙과 해빙을 반복한다. 1번 트랙의 분열증적 사운드에 이어, 이들이 어떻게 고요를 자신들의 음악 자산으로 활용하는지 그 실체를 증명하는 두 번째 트랙 「나는 바람에게 말하네(I Talk To The Wind)」가 불어온다. 다가올 절멸에 대한 묵시록적인 비관으로 점철된 가사와 상관없이, 앨범의 세 번째 트랙 「묘비명(Epitaph)」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에 등재되었지만, 이들의 음악에 열광하는 386세대조차, 크림즌 왕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고, 어떤 음악으로 세계를 움직이게 했는지, 그 구체적인 면모를 알고 있지 못하다. 나 역시 비슷한 처지이다.

프로그레시브 락, 아트 락 같은 명칭의 범주 안에 귀속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1960년대 말에 태동하고 1970년대 초반에 르네상스적 광휘를 펼쳐보였다가 1970년대 후반 들어 소멸했던 예술적인 락 음악의 경계 안에 킹 크림즌의 음악을 가둘 수는 없다. 어떤 예술적 운동의 시원. 독창성을 넘어 단독성(單獨性)을 성취한 음악. 실험적 락 사운드와 시적 가사의 결합. 명사가 지시하는 개념으로 음악을 표현할 수 있다면…….
음악과 언어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음악은 언어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증폭하고 의미를 창출한다. 언어는 음악을 통해 물리적 현재로 진입한다. 음악의 순수한 추상성은 언어라는 육체를 통과하면서 삶의 구체성을 획득한다. 언어의 가변적인 기호 관계는 음악이라는 영원한 추상의 현재를 동경한다. 「묘비명」이 시작될 때 들리는 팀파니 소리와 멜로트론의 장중한 선율을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만, 그 말로 음악이 구현하는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는 분명히 음악과 언어 사이에 존재하지만, 그것이 어떤 아름다움이고 어떻게 표현된 아름다움인지, 우리가, 음악을 지금 이 순간 듣지 않는다면, 절대로, ‘이’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내가 듣는 「묘비명」과 당신이 듣는 「묘비명」.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곳에서 그것을 같이 듣는다고 하자. 비 내리는 당신의 창가와 가을 햇빛 넘실대는 나의 창가, 그 공간을 채우는「묘비명」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슬픈 나와 즐거운 당신이 듣는 하나의 노래 「묘비명」은 비탄과 행복으로 분리되는, 분명, 다른 노래이다. 지금 「묘비명」은 당신의 심장을 지나 나의 귀를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엘피(LP)를 뒤집어야 하네요.

킹 크림즌의 핵심은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다. 네 번째 트랙 「문차일드(Moonchild)」의 가사가 달빛에 녹아내린 후에 들려오는 기타 연주. 완강한 형식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음 하나하나를 갖고 노는, 음악이라는 건물을 만드는 개별적인 음 하나하나를 실험하고 있는, 듣는 사람을 못 의자에 앉게 하지만, 귀를 잡아채는 감각은 상쾌하기 그지없다. 다시 이어지는 멜로트론의 폭포.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선사하는 절망. 이 감정을 언어로 옮기지 못하는 더 큰 절망. 나의 절망을 사뿐히 밟고 전진하는 크림즌 왕이시여.

첫 번째 싱어였던 그렉 레이크(Greg Lake)가 프로그레시브 트리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를 결성하기 위해 밴드를 떠난 후, 존 웨튼(John Wetton)이 베이스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게 된 74년 앨범 『빨강(Red)』을 듣는다. 프립의 기타와 웨튼의 베이스와 빌 브루포드(Bill Bruford)의 드럼이 기묘한 긴장과 다툼과 파열과 협정을 통과하는 듯한 격렬한 앨범. 수록된 5곡 중의 백미는 「별이 사라진(Starless)」. 프립이 공명시키는 기타 현의 색깔은 백색. 1분 30초가 지날 즈음 처연한 목소리가 낮게 기어온다. 별을 잃은 밤의 장막이 다시 드리우기 전에는, 우리가 실명(失明)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당신은, 나를 그리워하리라, 반드시. 나의 읊조림이 끝나기 전에, 장전되었던 기타의 반복음이 시작된다. 로버트 프립은 어둠을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딜런 토마스(Dylan Thomas)의 시에서 제목이 나왔다. 리차드 파머 제임스(Richard Palmer-James)가 작사했다. “찬란한 날의 일몰 / 황금빛이 내 눈을 비추네 / 하지만 이제 내 눈에는 / 별 없는 밤 그리고 검은 성경 // 시리도록 차가운 은빛 하늘 / 회색 구름으로 변해가네 / 언제나 그렇듯이 희망도 회색으로 변해가네.” 절망을 파열시키는 연주의 절정 속에서 내가 바라보는 붉은 희망. 이것은 시각으로 번역된 음악의 이미지. 이 앨범의 첫 곡이 「빨강」이었던 이유.

2000년에 선보인 『빛의 건축(The Construkction Of Light)』에는 이전까지 리듬 섹션을 담당했던 드러머 빌 브루포드와 베이시스트 토니 레빈(Tony Levin)이 참여하지 않는다. 원년부터 크림즌의 왕이었던 로버트 프립이 에이드리언 벨류(Adrian Belew)와 트레이 건(Trey Gunn)과 팻 마스텔로토(Pat Mastelotto)와 완성한 「빛의 건축」을 듣는다. 기타 음 사이를 베이스가 촘촘하게 채우고, 다음 기타 음은 한 발 더 나아가고, 다시 축자적(逐字的)으로 음들이 연속된다. 빛의 주렴(珠簾), 빛의 빙폭(氷瀑). 정교한 빛의 집이 건축되고 있다. 정확하게 전진한다. 조였다가 풀어버리는, 긴장과 방출의 조화.

킹 크림즌은 한 장의 앨범, 그것도 데뷔 앨범으로 프로그레시브 락의 정점에 올랐다. 2000년의 앨범에서도 그들의 실험성은 변함없이 유지된다.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시 문제에 봉착한다. ‘아름답다’는 형용사의 무력함! 어떤 음악은 언어 이전의 힘을 발동시킨다. 킹 크림즌의 음악은 찬란하다. 그들이 건설한 음의 성채(城寨/星彩) 앞에서 느끼게 되는 아나키즘적 열광. 이들이 선사한 들끓는 에너지를 번역하기란 불가능하다. 감각을 집중하고 반복해서 들어야만, 물리적 시간을 전투적으로 투여해야만, 킹 크림즌은 그 신비의 문을 열어준다. 킹 크림즌은 포스트-프로그레시브 락(post-progressive rock)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빠질 수가 없다. 9분을 휘젓는 기타 아르페지오가 듣는 이를 혼몽 속으로 밀어 넣는 「프랙처드(FraKctured)」가 신경 쇠약을 불러온다. 숨을 막히게 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킹 크림즌을 들으면서 ‘갈라진다(fractured)’. 로버트 프립의 기타가 듣는 이의 마음을 가른다. 낯섦이 난해를 불러온다. 난해의 장막을 뚫고 들어가야만 ‘빛의 건축’을 경험할 수 있다. 자, 이제 형용사 ‘아름답다’의 의미 하나를 얻은 듯하다. 킹 크림즌의 전위적 음악과 시적 가사의 융합, 그 휘황한 빛의 세계를 체험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움의 감각적 현실화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킹 크림즌의 노래가 시의 중요한 의미 맥락으로 교직된 시 한 편을 인용한다.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된 그것을 나는 모른다

누구의 눈물과 누구의 체액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나의 일부였던 것이 사라지고 있다
시원은 어두운 주름이었다

그것이 나를 왜곡시키고 나를 해석한다
나는 노예이므로 굴종에 쾌감을 느낀다
미래에 사랑이 이루어지고 행복엔 날개 돋을까?

개좆 같은 진보, 개좆 같은 진보주의
미래라구?

(confusion will be my epitaph. I'll be crying……)
―장석원, 「악마를 위하여」(『아나키스트』) 부분


■장석원은… 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을 네 권(『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역진화의 시작』, 『리듬』) 출간했지만, 음악 산문집 『우리 결코, 음악이 되자』(2010, 작가)를 시집만큼 아끼고 있다. 모든 종류의 음악을 사랑하는 황봉구 시인에게 지난 여름 킹 크림즌(King Crimson)의 1집 LP를 선물 받고는 작은 턴 테이블을 구입,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레코드를 다시 듣게 되었다. 벽장 속에 방치되어 있던 검은 비닐 재질 음악 저장 장치를 불빛 아래로 가져온 후, 음악의 나라에 다시 살기 시작했다. 현재, 광운대학교 국문과에서 학생들에게 시와 시론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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