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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눈 먼 시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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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와 혈관이 목을 지난다. 중요한 기관이다. 기요틴이 작동해서 두 기관을 절단하면 곧바로 죽음이다. 나의 대학선배인 소설가 신상성(74)은 젊을 때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정글에서 백병전을 했는데, "목을 베어 머리가 달아나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어 꾹 눌렀더니 고대로 붙더라. 죽을 것을 살았다"고 침을 튀겼다. 오르한 파묵(65) 못잖은 입심이지만 그 거짓말을 누가 믿으랴.

신경과 혈관의 중요성이야 모를 바 아니다. 허나 생명유지를 위한 노동은 사실 식도와 기도가 한다. 숨을 쉬고 음식을 먹어야 생명을 부지한다. 식도와 기도가 하는 일이 엄연히 다른데, 가끔 헷갈려서 사고가 나기도 한다. 약하게 나면 사레가 들리고 심하게 나면 기도가 막혀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최재천(63)은 2012년에 낸 '다윈지능'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 옛날 우리가 물고기였을 때는 물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했다. 물고기가 포유류로 진화하면서 숨을 쉬기 위해 생긴 콧구멍은 배보다 등에 있어야 유리했다. 우리는 이때 엇갈린 두 관의 위치를 바꾸지 못하고 대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코로 들이마신 공기는 목 앞쪽에 있는 기도를, 입으로 들어온 음식은 기도 뒤에 있는 식도를 통과하는 교차 구조가 되었다.

이런 교차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음식물을 삼킬 때 기도를 막아주고 숨을 들이마실 때 열어주는 '후두개'가 생겼다. 급히 음식물을 삼킬 때 등 실수로 후두개가 기도를 막아주지 못하면 말썽이 생긴다. 이러한 불완전성을 영국의 동물행동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에 비유했다.

윌리엄 페일리는 '자연신학'에서 복잡한 물건은 반드시 설계자가 있게 마련이라며 시계공을 예로 들었다. 페일리는 영국 성공회 신부로서 공리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자연신학'을 통해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쟁을 해설했다. 도킨스는 페일리의 예를 꼬투리 잡아 '진화 과정에 설계자가 존재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눈이 먼 시계공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도킨스가 보기에 자연선택의 결과로 태어난 오늘날의 생명체들은 마치 숙련된 시계공이 설계하고 수리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계공이 나름대로 고쳐보려 애쓰는 과정에서 실패를 거듭하다 가끔 요행으로 재깍거리며 작동할 뿐이다. '예수쟁이'인 나로서는 아주 집중을 해서 읽어야 할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가끔 세상이 복잡한 데 비해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이 이상할 정도로 적다든가 태양계와 은하계의 구조가 핵의 주위를 전자가 회전하는 구조와 다름없음을 보면서 "아, 신은 세상을 창조하는 데 그다지 많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구나. 역시 신이야"라고 생각해왔다. 인간과 원숭이의 유전자가 대부분 일치한다는 신비는 사실 구더기와도 유전자를 공유한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찌 허풍을 치랴. 고개 숙여 세상을 만나고 섭리를 섬겨 차분히 살아갈 뿐. 인간은 섭리를 이해하고 겸손을 실천할 때 비로소 위대해진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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