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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파꽃/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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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하나 밀어 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마당 안에 극지(極地)가 아홉 평 있었으므로

아,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그냥 혼자 사무치자

먼 기차 대가리야, 흰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

■ 사무치게 애틋한 시다. 그런데 이 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시인이 쓴 시다. 그래도 읽고 나면 자꾸 엄마 생각만 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시인들이 쓴 시를 엮은 시선집에 실린 시들 중 하나다. 그래서인가,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엄마 생각에 먹먹해진 내가 문득 의심스러워진다. 아무래도 블랙리스트에 오른 시인이 쓴 시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 하나 키우자고 평생 "다리가 퉁퉁 부"어 살아온 엄마도 이미 아주 오래전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았을까 싶고, 어릴 때 살던 조붓한 집 마당과 마당 한편에 피곤 했던 파꽃들과 그 푸르스름한 꽃들 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흰나비들도 감히 떠올려서는 안 될 불온한 금서들만 같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기형도 시인은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고 적었다. 이제는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냥 혼자" 엄마 생각에 "사무치"는 것마저도 검열 대상이 되어 버렸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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