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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자베르와 우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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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경제로 생계형 범죄가 급증했다고 한다. 동전 800원으로 자판기 커피를 꺼내 마신 버스 기사가 해고되고, 마트에서 5000원을 훔친 젊은이가 구속되는 냉혹한 세상이다. 수백억의 뇌물을 바치고 경영 승계를 보장 받은 재벌총수가 구속을 면한 걸 보면, 역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란 말이 맞지 싶다. 굶주림을 못 이겨 막걸리 한 통을 훔친 20대 실직자에게 각계의 도움이 이어졌다니 그나마 마음이 푸근해진다.

생계형 범죄를 요즘은 '장발장 범죄'라 부르는 모양이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고 투옥돼 19년 징역을 산다. 그는 실정법의 잣대로 보면 범죄자다. 출옥 후 미리엘 신부의 은혜를 갚기는커녕 촛대와 접시를 훔쳐 달아나는데, 이는 가중처벌을 받을 만한 재범이다. 하지만 그는 공장에서 해고된 뒤 매춘의 나락에 떨어진 팡틴을 보듬어주고, 그녀의 어린 딸 코제트가 잘 자라도록 보살펴준다. 학생 봉기에서 중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업고 캄캄한 하수구를 통과해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현실의 규범에서 때로 일탈했지만 일관되게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한 그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준다.
그와 대척점에 있는 자베르 경감은 어떤 사람일까? 단순한 선악 구도로 보면 ‘나쁜 놈’이 분명하다. '좋은 사람' 장발장을 지구 끝까지 추적하며 괴롭히기 때문에 '나쁜 놈'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얘기가 간단치 않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그는 밤하늘 가득 펼쳐진 별을 바라보며 '별들(Stars)'을 노래한다. 장발장은 "신의 은총에서 떨어져 어둠 속으로 도망하는 자"고, 자기는 "주님의 정의로운 길을 따르는, 보답 받을 자"다. 그는 장발장을 잡아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밤하늘을 빛과 질서로 채우는 별들"에게 다짐한다. "하늘에는 별, 내 마음엔 도덕률", 칸트의 격언을 연상시키는 자베르의 굳은 맹세는 숭고한 느낌마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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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대의 엘리트로 자기 중책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떠받든 질서는 위계에 바탕한 기득권 체제였고, 그의 주님은 인간의 온기가 결여된 냉정한 기계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 학생들에게 잡힌 그를 장발장이 풀어주자 지금껏 몰랐던 빛의 세계가 열리지만, 그는 결국 자살을 택한다.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나쁜 놈'임을 깨닫고 스스로 단죄한 것이다.

지난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대한민국 1%'의 상징이 된 우병우의 성장과 몰락 과정을 다룬 바 있다. 고등학생 시절 '부패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일찌감치 검사의 꿈을 키운 그는, 세상과 담을 쌓은 채 1등만 추구하며 공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자기가 원하던 커리어를 모두 이뤘지만 '부패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초심을 잃어버렸다. 넋 놓고 위를 향해 달리느라 숱한 희생자를 만들면서 자신이 부패 사슬의 일부로 변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이 나라 지도층의 핵심에 포진해 있는 '영혼 없는 공부기계'의 민낯이었다. 그의 사법연수원 동기 한 명은 "(우리 사회는) 그런 괴물이 탄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구조"라고 지적했다.
수사를 피해 잠적했다가 네티즌의 공개수배라는 수모를 당한 뒤 청문회에 나와서 "모른다"고 일관한 우병우, 그가 특검에서 자기혐의를 인정하고 이 처참한 몰락의 원인을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자베르처럼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스스로 단죄하는 결단을 내릴 것 같지도 않다. 그는 '나쁜 놈' 자베르의 품격에 훨씬 못 미치는 '가련한 자'로 커리어를 마무리할 공산이 크다. 자베르가 '밤하늘의 별들'에게 맹세하는 모습을 본 빈민가의 꼬마 가브로슈가 가볍게 한 마디 던진다. 우병우의 행색을 보는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 주는 것 같다.

"저 경감님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아시나본데, 이 동네를 움직이는 건 바로 저에요."

이채훈 클래식 비평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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