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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일본인, 스기하라 지우네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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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살육을 피해 도주하는 수천명을 용기있게 도와준 '일본판 쉰들러'


스기하라 지우네는 외교관으로서 국가의 명령에 맞서 인도적 양심에 의해 비자를 발급함으로 사지에 내몰린 6,000여 명의 유대인 난민을 구한 '동방의 의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스기하라 지우네는 외교관으로서 국가의 명령에 맞서 인도적 양심에 의해 비자를 발급함으로 사지에 내몰린 6,000여 명의 유대인 난민을 구한 '동방의 의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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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크리스마스를 맞은 지난 주말, 아기 예수를 끌어안은 마리아 성화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오직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기억했던 제자들이 이를 입으로 전해 후세 사람들이 문자로 종이에 기록한 것이 경전으로만 남은 탓에 아기 예수의 형상은 그리는 자의 믿음과 상상에 따라 제각각이나, 신앙을 되새김질하며 인류의 죄를 ‘대속’한 대상을 향한 숭배는 많은 이콘(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남겼다.

동방정교회에서 만들어진 이콘은 성서 안팍의 인물들까지 그 대상이 다양한데, 그중 눈에 띄는 동양인 한 명이 있다. 일본인 스기하라 지우네. 본디 가톨릭과는 무관한 정통 무사 집안의 자제로,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와세다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며 더 넓은 세상에서의 꿈을 키우던 청년은 무슨 까닭으로 서방국가의 이콘에 등장하는 성자로 오늘까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추앙을 받게 된 것일까?

와세대 대학 입학 전후의 스기하라 지우네

와세대 대학 입학 전후의 스기하라 지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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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에 능통한 청년

일본 기후현 미노쵸에서 1900년 1월 1일에 태어난 지우네는 세무관리였던 아버지와 사무라이 가문에 흐르는 엄격한 가풍에도 비교적 자유로운 유년을 보냈다. 소학교 시절부터 전 과목 만점을 받으며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그가 대학진학을 앞둘 무렵,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경성에 부임한 아버지는 아들이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진학해 자신의 곁에서 의사가 되는 것을 희망했지만, 더 넓은 세상을 꿈꾸던 청년에게 조선은 기회의 땅이랄 수 없었고 의사의 길은 너무도 답답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경성의전 시험장에서 백지 답안을 제출하고 돌아온 그는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와세다대학교 고등사범부 영어과 예과에 진학해 필기는커녕 펜은 귀에다 꽂고도 수업 내용은 곧잘 암기해 놀면서 시험은 잘 치르는 괴짜로 젊음을 만끽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경제적 원조를 끊는 것으로 자신의 분기를 표현했다.

부랴부랴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 고학 전선에 나선 지우네는 우연히 응시한 외무성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자 학교를 자퇴하고 중국 하얼빈으로 파견돼 러시아어를 익힌다. 지우네는 영문학 전공자였지만, 그의 언어적 재능이 탁발함을 알아본 시험 감독관이 향후 러시아어가 더 중요하게 쓰일 것을 역설하자 러시아어를 선택한 것. 이듬해 조선에서 2년간의 군 생활을 마친 그는 1924년 외무성 서기로 채용돼 러일협회 학교와 하얼빈 대사관 통역관으로 경력을 쌓은 뒤 1932년 만주국 외교부 사무관으로 발령받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경계한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얻은 철도부설권을 바탕으로 하얼빈을 중심으로 다롄까지를 잇는 '동청철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이듬해 만주국이 세워지자 러시아는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 철도의 권리를 일본에게 양도하게 되는데, 이때 스기하라 지우네는 당초 러시아가 제시한 거액의 협상금을 1/6 수준으로 낮춰 양도 협상을 체결해 러시아와 일본 양국으로부터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는다. 사진 = 동청철도 지도, McClure’s Magazine 제공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경계한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얻은 철도부설권을 바탕으로 하얼빈을 중심으로 다롄까지를 잇는 '동청철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이듬해 만주국이 세워지자 러시아는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 철도의 권리를 일본에게 양도하게 되는데, 이때 스기하라 지우네는 당초 러시아가 제시한 거액의 협상금을 1/6 수준으로 낮춰 양도 협상을 체결해 러시아와 일본 양국으로부터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는다. 사진 = 동청철도 지도, McClure’s Magazine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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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여인

1924년 외무성에 채용되던 해 그는 하얼빈에서 만난 러시아 여인 클라브디아 세묘노브나 아폴로노바와 결혼하며 동방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일본이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 1873년의 일이었고, 그 전까지 일본 내에서 가톨릭에 대한 인식은 ‘가쿠레 키리시탄(숨은 크리스천)’으로 대변되듯 박해와 배척의 대상이었음을 상기할 때 지우네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나 이 결혼생활은 오래지 않아 1935년 파경을 맞는다. 이런 개인사적 불행과 반대로 그는 1932년 만주국 외교부 정무국 러시아 과장으로 재직하며 러시아와의 동청철도(현재 하얼빈철도) 양도 교섭 과정에서 큰 활약을 펼쳤는데, 당초 러시아가 제안한 6억 2,500만 엔의 요구액을 1억 4,000만 엔까지 인하해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 능력을 두루 인정받았다.

관리치고는 지나치게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던 지우네는 만주를 발판으로 대륙진출의 야욕을 보인 본국의 정책에 다소 반감을 갖게 되고, 만주에 주둔 중인 관동군 수뇌부는 그의 출중한 재능을 살려 유럽에 그를 스파이로 보내고자 거액의 조건과 상부의 압박을 통해 회유작전을 펼쳤으나 그는 일거에 군의 제안을 거절한다. 만주국이 명분상으론 독립국이었으나 사실상 관동군 휘하에 있는 조직이었으므로 상부의 지시를 거절한 그는 하극상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고, 군은 그를 파면하는 대신 그의 아내의 국적을 빌미로 ‘그녀가 러시아의 스파이’라는 소문을 퍼트려 이들의 결혼관계를 파탄 냈고, 지우네는 홀로 본국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스기하라 지우네를 주인공으로 그려낸 영화 '스기하라 지우네'는 외교관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고뇌의 순간을 담담하되 섬세하게 그려내 많은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사진 = 영화 '스기하라 지우네' 에서 주연을 맡은 카라사와 토시아키

스기하라 지우네를 주인공으로 그려낸 영화 '스기하라 지우네'는 외교관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고뇌의 순간을 담담하되 섬세하게 그려내 많은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사진 = 영화 '스기하라 지우네' 에서 주연을 맡은 카라사와 토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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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인생 2막

만주에서 축적한 모든 재산을 전처에게 위자료로 건네고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돌아온 지우네는 외무성에 복귀하며 일상의 평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외교현장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한 탓에 소련은 그의 뛰어난 언어실력과 협상능력을 경계했고, 관동군은 상부의 지시를 거절할 만큼 자유로운 그의 사상을 적시(敵視)했다. 지인의 여동생인 키쿠치 사치코와 두 번째 결혼을 올리며 생활의 안정을 찾은 지우네는 모스크바 대사관 부임을 희망했으나 러시아 당국에선 단칼에 그를 거절해 핀란드 헬싱키 일본 공사관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핀란드 근무 중엔 그의 재능을 높이 샀던 프랑스 주재 일본대사가 그를 자신의 휘하로 보내달라 외무상에게 극비 전보로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일이 발생한다. 1939년 일본 외무성에서는 그를 독일 인접국으로 보내 당시 2차 세계대전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하는 정확한 시간과 진로를 신속히 사전에 파악고자 했고, 곧장 일본인이 한 명도 없는 러시아 병합 전 리투아니아의 임시 수도였던 카우나스에 일본 영사관을 개설해 그를 영사대리로 발령 보내며 사태 추이를 관망했다.

스기하라 지우네가 자필로 발급한 비자, 매겨진 번호로만 확인 된 발행 수가 2139개이며 당시 비자 하나로 일가족의 통행이 가능했음에 6,000여 명의 유대인 난민이 그가 발행한 비자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스기하라 지우네가 자필로 발급한 비자, 매겨진 번호로만 확인 된 발행 수가 2139개이며 당시 비자 하나로 일가족의 통행이 가능했음에 6,000여 명의 유대인 난민이 그가 발행한 비자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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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비자

이듬해인 1940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유대인 난민들을 옥죄는 독일군의 포위망이 점차 좁혀지던 그때, 러시아는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각국 영사관에 폐쇄를 요구한다. 유일한 희망이던 터키령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루트마저 차단당한 유대인 난민들은 정보수집 목적을 위해 아직 운영 중이던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일본영사관으로 몰려들어 자신들을 나치의 살육에서 구해주기를 눈물로 청원했고, 별안간 새벽부터 영사관 담벼락 앞으로 몰려온 난민들의 읍소에 지우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즉각 본국에 이 상황을 전하고 비자 발급 승인 여부를 물었으나, 독일·이탈리아와 삼국 군사동맹 체결을 앞둔 일본 입장에서 유대인 난민의 도주를 돕는 비자발급은 훗날 문제의 소지가 있었으므로 외무성은 ‘대상 국가의 입국 허가 절차를 완료하고 체재비를 충분히 소지한 자에 한해 비자를 발급할 것’을 회신했다.

시베리아 철도를 거쳐 극동으로 도주하는 것 외에 유대인이 유럽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던 긴박한 상황. 갓난아이를 업고, 늙은 부모를 이끌고 밤낮없이 일본 영사관 앞에 서서 눈물로 호소하는 수백의 난민을 지켜본 지우네는 외교관으로서 견지해야 할 인도적 태도와 그 자신이 갖고 있던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본국의 명령을 거스르고 비자를 직접 발급하기 시작했다. 아내 사치코도 곁에서 수기(手記)로 발급을 도왔고, 이들은 28일 동안 하루 20시간을 비자작성과 도장 찍기를 반복한 끝에 많게는 하루에 300장의 비자를 발급했다. 러시아 정부와 본국 외무성의 거듭된 퇴거 명령에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기는 중에도 그는 호텔에서까지 비자를 작성했고, 열차에 오르고 나선 자신의 서명과 낙관이 담긴 서류뭉치와 도장을 창밖으로 던져 피난민들이 스스로 기입해 비자를 완성할 수 있게 도왔는데, 당시 발급한 비자는 번호가 부착돼 기록된 것만 2,139개에 달했고, 이를 통해 유대인 6,000여 명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983년 후지TV 다큐멘터리 ‘운명을 나눈 1장의 비자-4,500명의 유대인을 구한 일본인’에서 당시 소회를 밝히는 스기하라 지우네, 사진 = 후지TV 캡쳐

1983년 후지TV 다큐멘터리 ‘운명을 나눈 1장의 비자-4,500명의 유대인을 구한 일본인’에서 당시 소회를 밝히는 스기하라 지우네, 사진 = 후지TV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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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고난, 감격의 재회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한 그였지만, 이후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총영사로 재직 중엔 독일군 동향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독일로부터 간첩으로 의심받아 한동안 게슈타포의 감시망에 시달려야 했으며, 2차 세계대전 말엽엔 소련군에 구속돼 고초를 치르다 종전 후에야 본국으로 송환됐다. 전쟁이 끝나자 외무성은 그간 지우네의 탁월한 언어능력과 외교수완에 가려 미뤄두었던 임의비자발급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퇴직을 통보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셋째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고, 여동생이 사망하는 등 개인사적 불행이 이어졌으나 지우네는 예의 그 뛰어난 외국어 능력을 살려 무역회사의 모스크바 지사장, 번역가 등으로 활동하며 해외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한편, 그가 발급한 생명의 비자로 목숨을 구한 유대인들은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대륙을 지나 일본을 거쳐 상하이나 미국으로 몸을 피해 정착했는데, 당시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리투아니아에 남은 유대인은 나치 점령 후 약 20만 명이 희생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지우네로 인해 목숨을 구한 이들은 이후 끊임없이 그를 찾기 위해 일본 외무성에 그의 소식을 문의했는데 “해당자 없음”이란 답신만 돌아오던 차, 과거 난민들의 이후 소식을 걱정하던 지우네가 이스라엘 대사관에 자신의 주소를 남긴 것을 통해 그의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당시 생명의 비자를 통해 생존한 난민 중 한 소년, 니슈리(B. Gehashra Nishri)가 자라 일본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참사관이 되어 일본에 오자마자 지우네를 찾고 재회한 일은 유대인을 넘어 많은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리투아니아 시가지 동쪽 언덕 주택가에는 스기하라가 근무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카우나스 일본 공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한 대학의 아시아연구소로 쓰이던 공관은 스기하라를 기리는 리투아니아, 벨기에 학자와 기업인이 세운 '생명의 외교관-스기하라재단'이 건물 일부를 사들여 '스기하라의 집'으로 꾸미고 당시 집무실과 기념물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 일본 문예연구가 カジポン 제공

리투아니아 시가지 동쪽 언덕 주택가에는 스기하라가 근무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카우나스 일본 공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한 대학의 아시아연구소로 쓰이던 공관은 스기하라를 기리는 리투아니아, 벨기에 학자와 기업인이 세운 '생명의 외교관-스기하라재단'이 건물 일부를 사들여 '스기하라의 집'으로 꾸미고 당시 집무실과 기념물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 일본 문예연구가 カジポン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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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외면, 업적 재조명

니슈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유대인 사회에서는 지우네에 대한 감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됐으나, 정작 일본 내에서는 악의에 찬 중상과 냉담한 반응이 이어졌다. ‘스기하라는 유대인들에게 돈은 받고(비자를 발급) 했으니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옛 외무성 동료들 사이에 파다했고, 일본 정부는 상부의 지시를 거스르고 선행을 베푼 그의 ‘하극상’을 기화로 공적에 대한 감사를 외면했다. 이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한 일본 주재 독일기자 게르하르트 덤프만은 국가명령을 저버리고 수천의 생명을 구한 그의 이야기를 세계 각국에 소개했고, 2년 뒤인 1983년 후지TV에서 ‘운명을 나눈 1장의 비자-4,500명의 유대인을 구한 일본인’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그의 업적을 다루면서 지우네 본인과 부인 사치코 인터뷰를 통해 당시 심경과 현재의 생활상을 소개했다.

1985년 이스라엘 정부는 그에게 야드바셈상(유대인 학살을 추도하며 수여하는 ‘의로운 이방인’ 상)과 ‘열방의 의인’이란 칭호를 수여했는데, 수상 메달에 새겨진 문장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로, 탈무드의 한 구절이었다. 같은 해 11월엔 예루살렘의 언덕에 기념비가 세워져 그의 공적을 기렸으나 지병으로 이를 지켜보지 못한 지우네는 이듬해인 1986년 심장병으로 86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의 명예 회복에 입장을 표한 것은 그로부터 14년 뒤인 2000년, 외무장관 고노 요헤이의 연설을 통해서였다.

“지금까지 외무성과 고 스기하라 씨의 가족 여러분 사이에 무례함과 명예에 관한 의사소통이 부족했던 점을 외무 장관으로 이 기회에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일본 외교에 종사하는 책임자로서 외교 정책의 결정에 있어 어떤 경우에도 인도적 고려는 가장 기본적이고 또 중요한 것이라 저는 느낀 바 있습니다. 고 스기하라 씨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따른 극한적 상황에서 인도적이고 용기 있는 판단을 함으로써 외교관의 인도적 입장의 중요성을 보여줬습니다. 저는 이런 훌륭한 선배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동방정교회 이콘(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으로 그려진 스기하라 지우네의 초상

동방정교회 이콘(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으로 그려진 스기하라 지우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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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가문의 아들로, 철저한 상명하복 문화가 팽배했던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리투아니아에서 지우네가 펼친 28일간의 호의는 그 일생의 지침을 돌려놓고 수천의 생명을 살리되 개인의 삶을 앗아간, 어쩌면 인생 최대의 실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 담담히 말했다.

국가가 개인, 특히 공직자로서 한 사람에게 거는 기대와 지시, 제안과 명령 앞에 약속된 미래와 개인의 행복을 저버리고 인도적 양심을 이유로 하극상을 감행한 스기하라 지우네의 선택은 어쩌면 한 인간이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임을 증명한 일대 사건은 아니었을까. ‘생명의 비자’는 유능한 외교관을 한순간에 야인으로 만든 창이자,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방패로 여전히 유효한 고민을 우리에게 안긴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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