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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묵은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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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김장철이 되면 1년 동안 식탁을 지켰던 지난 김장 김치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이미 푹 익은 묵은지가 됐는데 이제 갓 버무린 상큼한 생김치와 나란히 놓여 젓가락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껏 봐왔던 정에 호소해 볼까 아니면 완숙하게 발효된 맛을 뽐내 볼까, 묵은지가 어필할 매력도 적지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젓가락이 향하는 곳은 첫 선을 보인 새롭고 싱싱한 생김치이기 쉽다. 묵은지는 절인 배추에 양념이 채 어우러지지도 않은 풋내기 김치를 쭉 찢어 흰 쌀밥에 척 얹어 먹는 사람들을 야속하게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장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며 흐르는 것을.

그렇다고 묵은지의 신세가 영 처량하게 된 것만은 아니다. 새뜻한 생김치에 처음엔 밀리지만 이내 묵은지만이 가능한 다양한 변주로 식탁의 지분을 놓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곰삭은 맛을 선사하기도 하고 양념 털어내고 참기름과 어우러져 씻은 김치로 새콤한 변신을 하기도 한다. 고등어나 밴댕이, 멸치 등을 넣고 지져 먹어도 좋다. 지지는 것은 국물을 조금 붓고 끓여서 익히는 조리법이다. 묵은지를 지지면 생선의 비린 맛을 잡고 생선의 기름은 김치에 스며든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묵은지 활용의 제일 앞줄에 놓이는 것은 김치찌개다. 김치찌개는 누구나 끓일 수 있지만 아무 김치로나 끓일 수는 없다. 생김치는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묵은지만의 영역인 것이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도 "개운한 산미가 입 안에 확 번지는 묵은 김치가 아니고서는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일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에는 김치찌개는 묵은 김장 김치가 있어야 가능한 음식이었고 냉장고가 부엌에 놓이기 전까지는 겨울부터 늦은 봄까지만 먹을 수 있었다"고 썼다.

묵은지의 힘은 김치찌개의 다양한 재료들과의 조화에서 나타난다. 돼지고기나 참치는 물론이고 꽁치, 소시지, 햄, 어묵, 두부 등과도 잘 어울린다. 1년 동안 발효되면 유산균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어울리는 친화력도 생기는 것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묵은지를 물이나 육수에 넣고 원하는 재료들을 더해 한소끔 끓인 뒤 다진 마늘이나 파를 넣고 마무리하면 김치찌개는 완성된다. 이렇게 끓여 밥상에 올린 김치찌개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요리가 된다. 생김치가 입맛 돋우는 샐러드쯤이라면 이 김치찌개는 메인디쉬랄까.

김치찌개의 맛은 집마다 다른 김칫소, 발효 기간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서울의 을지로4가에는 산뜻하고 시원한 김치찌개 국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정육 식당도 있고, 고기를 많이 넣어 묵직하고 진한 맛으로 줄을 세우는 집도 있다. 이런 집들에서 찌개를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면 국물이 잘 밴 묵은지가 이 사이에서 뭉그러지면서 혀를 감싸고 이어 들어오는 돼지고기 등은 김치찌개 한 입의 충만함을 한층 끌어올린다. 여기에 밥 한 숟가락 밀어 넣거나 소주 한 잔 털어 넣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다만 묵어야만 빛이 나는 이런 매력이 모든 김치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보관을 잘못한 김치로는 뭘 만들어도 쓰고 짠 몹쓸 맛만 난다. 곰팡이가 슬어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김치는 결국 버릴 수밖에 없다.

뭐 김치뿐이겠나,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래돼 원숙해지기는커녕 고약해지는 경우 말이다. 한편으로는 서글픈 일이지만 혹여 부딪히면 흉한 꼴을 볼 수도 있으니 피하는 것이 좋다. 최근엔 무리 지어 다니며 서울역, 동대문 등에 출몰했다고 하니 주의 당부 드린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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