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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면도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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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플레어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의 기묘한 상쾌함을 남자들이 짐작하기 어렵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남자가 여자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칸트가 말하는 걸 대학 시절 들은 뒤, 사랑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사랑이 완전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 건 훨씬 뒤의 일이었다.

플레어스커트의 느낌을 고유한 '여성감'이라고 한다면, 턱밑을 오가며 털을 깎아내는 면도의 쾌감은 남성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여성도 면도를 하는 때가 없진 않지만, 내가 말하는 건 코밑과 뺨, 그리고 턱과 목을 오가며 쓸어내리고 밀어올리며 다시 훑어가는 면도를 가리킨다.
면도하는 남자는 나르시스트다. <게티이미지뱅크>

면도하는 남자는 나르시스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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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을 잔뜩 묻혀 날카로운 면도날로 목과 턱뼈 사이의 부드러운 살결 위를 갓자란 수염들을 삼제하는 것에는, 하루의 시간을 되돌리는 섬세한 리프레시가 있고, 파란 면도자국으로 엄격하고 정결한 표정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영혼의 기풍이 있다. 면도를 하는 순간의 모든 남성들은 완벽한 나르시스트다. 거울 속의 사내를 향한 질투와 연민이 있다. 대개 연민이 더 많지만, 턱을 끌어올려 길거나 짧은 목을 비쳐보며 하늘벼랑에 선 고독같은 걸 설핏 맛보기도 한다.

전기면도기는 그것대로 접촉의 질감을 선사한다. 충전된 전기의 알맞은 진동이 턱에서 뒷골 쪽으로 올라가 두뇌를 울리게 할 때, 뭐랄까 까닭 없이 생의(生意)를 돋우는 비장한 맛이 있다. 면도기 철망의 서늘한 기운이 턱과 목을 오갈 때 절삭력 좋은 날들이 숨은 0.1센티의 털들을 찾아내 가차없이 베어넘기는 소리는 덧없이 자라나는 시간을 잘라내듯 단호하고 아름답다.
저녁의 면도는 여유롭고 세심하다. 오로지 저 면도기의 절삭음을 듣기 위해 무심코 그것을 들어 턱에 갖다대는 때도 있다. 대개 면도기의 뒷쪽은 무엇인가를 움켜잡는 사내의 손바닥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어서 그것을 쥐기만 해도 어떤 의욕이 생겨난다. 아침의 면도는 마치 신체를 깨워 시간을 기입하는 성사(聖事)처럼 단정하고 비장한 맛이 있다. 세상의 정원사는 신(神)이지만, 한 남자의 정원사는 대개 자기 자신이다. 그가 가꾸는 건 초목만이 아니라, 그 정원이 이루는 공기를 가꾸는 것이다.

면도를 하면서, 왜 하필 코밑과 뺨, 그리고 턱에만 털이 나는 것일까 생각을 해본다. 이 털들이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그 한복판에 있는 입일 것이다. 눈도 중요하고 코도 중요하고 귀도 중요할텐데 조물주는 왜 하필 입을 이토록 중시한 것일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의 통로라 칙사대접을 한 것인가. 아니면 그곳을 통해 말이 나오고, 울음이 나오고, 음악이 나오기에 귀하게 여긴 것일까. 아니면 사랑의 입구인 키스가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인가. 신이 이토록 귀하게 여긴 것을, 인간은 또 왜 이리 극성스럽게 매일 깎아대고 있는 것일까. 입이 가벼워지고 어지러워지고 간사해지면서, 털의 보호를 받을 여유도 없이 돌격하기 위해서인가.

휴가 때면 가끔 면도기를 멀리 하고, 고삐 풀린 말처럼 갈기를 날리는 자유로움을 꿈꾼다. 일주일쯤 면도를 하지 않은 자신을 보면서, 이대로 덥수룩한 자유남이나 되어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휴가 끝날 무렵쯤 마음 어디선가 영혼의 오너가 튀어나와 면도기를 들고 길어진 턱수염을 훑기 시작한다. 그때서야 면도에 대한 모든 쾌감이, 나를 세상에 길들이려는 누군가의 계략이었구나를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세상이 원하는 말끔한 얼굴로 살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푸른 턱을 가진 남자로.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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