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제게 부모님은 존재 자체만으로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오죽하면 꿈목록을 썼을 때 1순위가 한국을 떠나는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저는 해외로 떠났고 거기서 자유롭게 많은 꿈에 도전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저는 다시 부모님 곁으로 와 있었습니다. 내 집 마련에 앞서 부모님 집 마련을 먼저 했고 부모님 노후대책을 위해 미친 듯이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노력해서 먹고 살 만해졌지만 끝없이 싸우고 신세한탄을 하는 부모님을 보며 화가 치밀었고 나 자신이 불쌍해 울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도 없이 고민하고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깨달은 것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두가지 유산을 남겨줍니다. 첫 번째는 경제적 유산이죠. 건물을 주는 부모도 있지만 빚을 물려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다행히 빚은 상속포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 내 삶을 포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나의 삶과 부모의 삶은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신체와 마음의 일부가 부모에게 묶여 있는 것처럼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게 되지요.
부모가 줄 수 있는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적 유산입니다. 우리는 20년 동안 부모와 함께 살면서 그들과 비슷한 세계관과 감정의 지형을 형성해 나갑니다. 성숙한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자랐다면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건강한 사람으로 클 확률이 높지요. 반면에 자식을 자신과 분리시키지 못하고 조종하는 부모, 술이나 도박에 중독된 부모, 아이를 신체적, 언어적, 성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아이에게 어른 역할을 기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 아이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또 세상에 대해 건강한 생각을 갖기 힘듭니다.
저의 경우 부모님이 물려주신(?) 경제적 결핍을 극복했던 것보다 정신적 결핍을 넘어서는 데 훨씬 더 깊은 치유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부모님을 포함한 다른 누군가가 뭐라 하든 저는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내 마음이 나만의 것임을 선택하고 타인에게 내 마음을 휘두를 권리를 주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데 10년, 내 마음의 주인이 되기까지 5년, 자그마치 15년이 걸렸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이제야 저는 독립된 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부모를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운이 나쁘면 20년을 고통 속에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용기 내어 내 삶의 결핍과 상처를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여 내 삶과 내 마음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평생을 그들에게 끌려 다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나'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김수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