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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담장길강물길담장/차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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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담장을 따라 걷는다 깊은 강물을 따라 걷는다 담장에는 울긋불긋한 커다란 잎을 매단 넝쿨이 이쪽 담의 바닥부터 담의 꼭대기까지 뻗어 있고 아니 건너편에서 이쪽 담으로 넘어오거나 이쪽 담의 넝쿨과 저쪽 담의 넝쿨이 꼭대기에서 만난 건지도 모르게 담은 꽤 높아서 넝쿨을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건너편으로 넘어가고 싶기도 했지만 담장은 내가 본 어떤 성벽보다도 깊었고 하늘에 가까웠으며 가끔 새가 담장 위를 휙 그으며 훌쩍 넘어가거나 넘어왔고 같은 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강물에 비친 담장 너머로 자주 시선을 던졌지만 그래봤자 아무 일도 없는 날들이 많았기에 이젠 아무 일도 없이 담장을 따라 긴 길을 걸었고 길은 담장과 높이를 알 수 없는 강물 사이에 놓여 있기에 사이의 길은 담장길강물이나 강물길담장으로 불렸다 비가 오면 강물이 불어나 담장이 우는 것처럼 길은 젖었다 사람들은 그냥 담장과 강물을 따라 걷는다

[오후 한詩] 담장길강물길담장/차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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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심한 시가 참 좋다. 애써 무심한 척하는 시가 아니라 "그냥" 무심한 시 말이다. 무심한 시를 읽다 보면 무심해지기까지 얼마나 고되고 슬프고 힘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그저 '무심한 시'가 아니라 '무심해져 버린 시'가 좋다라고 고쳐 써야 옳겠다. 이 시가 그렇다. 담장이 있다. 담장 너머에는 길이 있고 그 길 곁으로는 강물이 흐른다. 그 담은 참 높다. 강물은 깊고. 그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사람들은 어제도 그랬듯 오늘도 "그냥" 오가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떤 성벽보다도 깊었고 하늘에 가까웠"던 그 담장 너머를 간곡히 꿈꾸던 때가 있었던 거다. 어느 정도냐 하면 "같은 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말이지 "휙" 순식간에 담장을 건너가고 건너오는 새를 눈 속에 담을 만큼 그렇게 오랫동안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비가 오면 강물이 불어나 담장이 우는 것처럼 길은 젖"고 시인도 젖고 나도 우리도 젖는 것이겠지 싶다. 그러니 실은 "담장길강물"과 "강물길담장" 사이를 "그냥" 걸었던 게 아니다. 무심해지지 않으면 도리가 없어 그래 왔던 거다. 아니다. "담장길강물길담장"을 따라 오늘도 한없이 출렁출렁 건너고 또 건너고 있는 거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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