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 패럴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은 어쩌면 스포츠를 통해 인류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보여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각 선수마다 가지고 있는 장애를 품고(위에서는 '딛고'라는 표현을 썼지만 '품고'라는 쓰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최고를 향한 몸의 향연을 펼쳤다. 10세 때 두 팔을 잃은 이집트의 탁구선수 하마투는 맨발로 탁구공을 허공에 띄워 서비스를 한다. 라켓은 그의 입에 물려있다. 2패를 하고 경기장을 떠났지만 아무도 그의 저조한 성적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 안에서 그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를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레떼'라고 불렀다)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절단된 선수가 의족을 신고 넓이 뛰기에 도전하고 앞이 안 보이는 선수가 가이드의 소리에 의존해 트랙을 질주한다. 이미 한 번 좌절한 몸을 일으켜 세워 세상으로 끌고 나온 패럴림픽 선수들은 그들을 지켜보는 수많은 이에게 소리 없는 울림이 된다.
우사인 볼트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단거리 선수다. 정확히는 100미터를 가장 빨리 이동하는 인간이다. 냉정하게 육상 100미터 종목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출발선과 결승선을 그어 놓고 신호를 주면 죽어라고 뛰는 게 다다. 그들이 뛰고 있는 100미터라는 거리도 95미터나 105미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임의의 거리를 정해놓고 10초벽을 깼느니 마의 9.5초라는 말 자체가 실상 별 의미가 없다. 그가 임의의 100미터를 달린 기록이 9.7초든 9.6초든 아님 8.9초든 뭐 그리 대순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기록경신에 열광한다. 왜일까?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 기록을 0.01초 줄일 때 그는 전 인류를 대표해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빠르기의 한계를 조금 더 위로 밀어 올린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의 몸으로 완벽이라는 신의 영역에 가장 근접한 것이다. 고대 올림픽 우승자의 머리 위에 월계수 잎 화관을 씌워준 이유다. 신의 간택을 받아 신에 가장 가까워진 인간이기에.
올림픽 선수들의 최고를 향한 질주에 담긴 의미가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인류를 대표해 몸으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이루는 데 있다면 패럴림픽 선수들의 질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를 웅변한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모두 미래의 예비 장애인이다. 장애의 경중과 부위는 다르겠지만 지금 장애가 없다고 생각(혹은 착각)하는 누구나 결국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올림픽 선수들이 현재의 인류를 대표해 경기를 하고 있다면 패럴림픽 선수들은 (각 개인이 당면할) 미래의 인류를 대표해 우리가 겪을 다양한 종류의 한계를 미리 걷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땀에 담긴 스포츠의 신성한 가치다.
정용철 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