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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데니스 루헤인의 '무너진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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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글린 가문 3부작의 완결편

무너진 세상에서

무너진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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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낯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곧 앤서니 홉킨스를 떠올렸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데니스 루헤인의 눈빛과 표정은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온 홉킨스를 닮았다. 양들의 침묵은 멋진 영화다. 조디 포스터가 가장 매력적일 때 찍었다. 한니발 렉터 박사 역을 맡은 홉킨스의 연기는 신들린 듯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실린 공포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이명처럼 웅웅거렸다.

루헤인이 발표한 첫 소설은 '전쟁 전의 한 잔(A Drink Before the War)'이다. 1994에 나온 이 소설로 1995년 ‘샤머스 상’을 받았다. 이 사람의 장기는 범죄소설 부문인데, 가장 최근에 국내에서 발간된 소설은 '무너진 세상에서(World Gone By)'이다. 책을 펴낸 '황금가지' 출판사는 보도 자료에 소설의 장르를 '갱스터'라고 소개했다.
루헤인은 보스턴 사람이다. 그는 보스턴을 사랑한다. 그래서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벤 에플렉 같은 보스턴 토박이들이 루헤인의 작품에 열광하나보다. '마피아'는 대번에 이탈리아(시칠리아에 가면 마피아의 고향이라는 곳도 있다)와 시카고를 떠올리게 하지만 루헤인이 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보스턴이다. 보스턴과 마피아.

'무너진 세상에서'는 '운명의 날(The Given Day)'과 '리브 바이 나이트(Live By Night)'로 이어지는 3부작의 완결편이다. '운명의 날'은 보혁ㆍ노사ㆍ인종ㆍ남녀 갈등의 정점이었던 1919년 미국 보스턴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경찰 파업을 배경으로 한다. '리브 바이 나이트'는 금주법(禁酒法) 시대를 배경으로 어둠의 세계인 갱 조직을 사실적으로 다룬다.

'무너진 세상에서'에도 비정하고 잔인한 갱 조직의 이야기다. 커글린 가문의 막내아들 조 커글린이 주인공이다. 조직의 자문으로서 지역의 다양한 분쟁을 조정하고 새로운 사업을 설계하는 등 잘 나가던 조는 어느 날 자신이 살인청부의 목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불안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을 죽여 이득을 볼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둘 짚어 본다.
고아와 다름없이 자란 조에게 조직의 동료는 곧 가족이다. 마약 밀매, 밀주 제조, 살인 등 공동의 범죄는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러나 끝없는 상승욕구, 오직 한 사람으로 남으려는 의지(last man standing!)는 그들로 하여금 끝내 가족으로 남을 수 없게 한다. 그들은 '형제'를 바다에 처넣거나 목을 따고,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갱스터'라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가? 그래 봐야 '조폭', '조직폭력배'다. 한동안 국내에 조폭 영화가 많이 나왔는데,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어딘가 결핍된 사람들이다. 조는 이렇게 이해한다. - "아버지." 토머스가 불렀다. "응?"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에요?" 조는 토머스의 셔츠에서 구토 자국을 보았다. "아니다, 아들. 특별히 좋은 사람이 아닐 뿐이야."

사실 폭력이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잉여들의 자기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나약함과 불안감을 폭력으로 감출 뿐이다. 범죄자들은 자신들이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규율을 지킨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를 빼앗는다는 사실은 모른다. 자신들의 아내나 아이들이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갱스터'하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감독한 영화 '대부(God Father)'가 떠오른다. 속편이 나오면서 '대부'의 자리는 돈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 빈센트 만치니(앤디 가르시아)로 이어진다. 마이클은 '대부'에서 동생의 남편 카를로 리치(지안니 루소)를, '대부2'에서 형 프레도(존 카잘)를 죽게 만든다.

이토록 무자비한 처형으로 점철하는 영화에서 '가족(Family)', '형제', '사랑'이라는 말이 '유도동기(Leitmotiv)'처럼 되풀이된다. 마이클은 카를로를 목 조르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걱정 마. 내가 설마 누나를 과부로 만들겠어?" 프레도를 죽이기 전에는 입을 맞추며 말한다. "형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어."

루헤인의 소설에서도 '가족'은 강박관념처럼 등장인물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자신이 청부 살인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 조 커글린은 냉정하다. '누구든 살해당할 수 있다. 언제든, 무슨 이유로든.' 그를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아들 토머스가 고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다. 이런 대목, 이런 대화.

"아들을 사랑하나?" "세상에서 제일." "아들은 언젠가 떠나. 늘 그래. 평생 같은 방에 앉아 있다 해도 아버지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니까." "나도 아버지한테 그랬소. 당신은?" "비슷해. 그렇게 어른이 되잖아? 아이들은 매달리고 사나이는 떠나고."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한니발 렉터 박사도 가족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그는 1992년에 로빈 윌리엄스, 워렌 비티, 닉 놀테, 로버트 드 니로 같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오스카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소감을 "웨일스에서 텔레비전으로 이 모습을 보고 계실 어머니와 가족들, 11년 전 오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쳤다.

루헤인의 3부작은 순서대로 읽는 게 좋다. 시간이 없다면 '리브 바이 나이트'를 읽은 다음 '무너진 세상에서'를 읽어도 괜찮다. 나는 마지막 작품을 읽고 앞의 두 편을 거슬러 읽었다. 루헤인은 매정하다. 독자에 대한 위로 따위는 없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다음, 독자는 허무하거나 슬퍼진다. 루헤인은 복화술을 하듯 이런 문장을 묻어 두었다.

"다들 잘 지내구려. 모쪼록 편안하기를. 그가 죽은 자들에게 말했다. 그래도 사과는 하지 않으리다." huhball@


<데니스 루헤인 지음/조영학 옮김/황금가지/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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