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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베어링과 ELS

최종수정 2016.01.29 11:06 기사입력 2016.01.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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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필수 증권부장

전필수 증권부장

1995년 2월, 233년 역사의 영국 베어링은행이 파산했다. 1762년 설립된 베어링은행은 파산 직전까지 영국 6위 은행이었다. 선물쪽에선 세계 정상권을 다툴 정도였다. 이런 은행을 파산으로 내몬 것은 당시 20대였던 '트레이더' 한 명이었다.

베어링은행 싱가포르지점의 수석 트레이더였던 닉 리슨(Nick Leeson)은 싱가포르 거래소(SIMEX)와 일본의 니케이 225 선물 지수를 이용한 차익거래를 하고 있었다. 이 차익거래를 통해 리슨은 짭짤한 수익을 올리며 승승장구했지만 사실은 부실을 본사에 보고하지 않고 숨기고 있었다. 비밀계좌를 통해 부실을 감추던 리슨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니케이 선물에 투자를 했다.

당시도 일본의 '엔'은 대표적 안전자산이었다. 일본 증시 역시 변동성이 큰 시장이 아니었다. 리슨은 변동성이 적은 일본 증시의 특성을 이용한 전략을 짰는데 간략히 설명하면 단기간 폭락만 하지 않으면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였다.

문제는 1995년 1월17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고베 대지진으로 니케이 선물이 하루에만 6%, 1000포인트 넘게 폭락한 것이다. 단 하루 만에 리슨은 2000만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300억원)나 되는 손실을 봤다.

리슨은 이 손실을 감춘 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무리한 투자를 감행했다. 일본이 지진 복구를 위해 재정을 투입할 것이고, 이로 인해 증시가 회복될 것으로 보고 니케이 지수 상승에 베팅을 했다. 하지만 미국 금리정책의 영향 등으로 일본 증시가 꺾이면서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불과 보름 만에 2000만파운드였던 손실이 13억파운드까지 불어났다.
그제야 본사에서도 사실을 알았지만 피해 규모는 이미 수습 불가였다. 결국 그해 2월말 베어링은행은 법원과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에 파산 신청을 했다. 이후 베어링은행은 네덜란드의 ING그룹에 단 돈 1파운드에 팔리는 수모를 당했다.

새삼스레 21년 전 사건을 떠올린 건 올 들어 '핫 이슈'가 되고 있는 홍콩 H지수와 연계된 주가연계증권(ELS)과 국제 유가와 연계된 파생결합증권(DLS) 파동 때문이다. 원금 손실 구간에 진입한 ELS가 몇 조원이니, DLS 손실률이 70%를 넘는다느니 하는 뉴스가 쏟아지다 보니 상품 구조가 궁금해졌다.

ELS나 DLS 같은 상품들은 채권 등 안전자산에 원금의 상당 부분을 투자해 안정적 수익을 확보하고, 일부 금액으로 선물ㆍ옵션에 투자해 추가 수익을 노리는 구조로 짜여진다. 안전자산 비중이 높으면 손실이 날 확률은 적지만 기대수익이 낮고, 반대로 위험자산 비중이 높으면 기대수익은 높을 수 있지만 손실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H지수를 추종하는 ELS나 국제유가와 연계된 DLS 모두 크게 보면 이런 구조인데 파생상품 투자의 경우 선물의 방향성과 옵션의 변동성을 활용한 '커버드 콜(풋)'이라는 합성전략을 쓴다. 이 전략을 쓰면 지수가 일정 범위 안에 있으면 수익을 낼 수 있지만 예상과 달리 그 범위를 벗어나면 손실이 무한대로 커지는 단점이 있다. 세부전략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리슨이 했던 투자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 '키코'와 유사한 상품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상품이 어떻게 국민재테크 상품이란 얘기를 들을 정도까지 날개 돋친 듯 팔릴 수 있었을까.

지난해 불티나게 팔릴 때 ELS와 DLS의 판매자와 투자자들은 "설마 홍콩 H지수가 반 토막이야 나겠어요" "유가가 지금 100달러인데 50달러 밑으로 가겠습니까"라는 식이었다. 종목도 아니고, 시장 전체가 반 토막이 나겠냐는 생각이 투자자와 판매자를 용감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예측대로 항상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설마' 하던 일이 벌어지는 곳이다. 물론 모든 투자는 위험을 수반한다. 다만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위험이어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안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다.


전필수 증권부장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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