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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의 책 다시보기]전쟁을 기억한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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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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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논설위원]
한국전쟁 발발 65주년을 맞아 이 전쟁을 회고하는 책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두 권의 책에 특히 눈길이 간다. 무엇보다 ‘평범한 백성’들이 스스로 써 내려간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다.
‘전쟁포로’는 인민군으로 징발됐다가 전쟁포로가 되었던 송관호씨의 한국전쟁 체험기다. 올해 86세의 송씨는 스물 두 살이던 1950년 9월, 지금은 북한 지역인 강원도 이천군의 고향 마을에서 인민군에 징집돼 집을 떠난다. 군에 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그 길이 부모님, 고향과의 마지막이었다. 가까스로 탈영해 귀가길에 올랐지만 이번엔 미군에 붙들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돈을 잃은 걸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다가 어이없이 다시 국군으로 징집된 것이다. 최전방에서 만 2년10개월 동안 복무를 꼬박 마치고 1956년 만기제대했다. 남과 북의 군 생활을 모두 한 셈이다. 미군 군속까지 거친 뒤 남한 사회에 정착한 그는 슬하에 1남5녀를 두었다.

그의 수기는 40년 전 두툼한 가계부에다 손글씨로 적었던 것이다. 이를 초등학교 교사인 사위 김종운씨가 읽기 좋게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을 펴낸 눈빛 출판사의 이규상 대표는 이 기록에 대해 “86세의 인민군 포로 출신 어른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촘촘하게 남긴 전쟁포로 체험기는 남북의 상처를 치유하는 연고제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장군들의 회고록은 전쟁사나 자신들의 전공, 상대방에 대한 비난 일색으로 전쟁 중 일반 백성들의 처절한 삶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또 역사학자들의 전쟁사 역시 마찬가지로 전쟁의 가장 피해자인 일반 백성들의 처절한 체험적 삶은 거의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송 선생은 당신이 온몸으로 겪은 한국전쟁을 담담히, 아주 정직하게 기록하였기에, 마치 삼촌이나 큰형이 들려주는 얘기처럼 다정하고도 진솔한 목소리로 다가온다."(소설가 박도)

‘전쟁포로’와 같은 책을 특히 박도씨가 기다렸던 것은 그 자신이 발로 뛰면서 우리 근현대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헌신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지난 3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북남남녀의 사랑과 분단의 아픔을 담은 소설 '약속'을 내놓았다. 그는 2004년부터 세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맥아더 기념관을 샅샅이 뒤지다가 발견한 소년 인민군 포로사진에서 이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여섯 살 소년이었던 그는 “평생을 두고 꼭 쓰고 싶었던 작품”이라는 이 소설에서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기억들을 다 토해 놓았다.

그러나 박도씨에게 ‘약속’은 어쩌면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기록 작업의 필연적인 결과물인지 모른다. 그는 2004~2007년에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2,3권’을 내놓았다. 그가 NARA에서 방대한 파일을 뒤져 찾아낸 한국전쟁 사진들이다.
“비밀 해제된 한국 관련 사진(주로 한국전쟁 사진)들을 보자 50여 년이 지난 그때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여섯 살 난 소년일 때의 기억들이 가물가물 남았는데 그 사진들을 보자 바로 나와 내 이웃들의 살아 있는 모습처럼 다가왔다.”

송관호씨가 60년만에 털어놓은 체험기나 박도씨의 집념의 작업은 우리에게 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두 권의 책은 일단 전쟁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이 겪었던 수난기로 읽힌다.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할퀴고 찍히며 이리저리 내몰렸던, 자신의 땅에서 ‘난민’이 돼야 했던 민초들의 지옥 체험기다. 이들의 수난과 고통의 비명이며 울음이며 통곡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민초들의 '승리의 기록'이라고 해야 한다. 전쟁을 함께 견뎌낸 이야기며, 전쟁을 어떻게든 살아낸 기록이며, 전쟁을 결국 이겨낸 이야기다. 그리하여 그 어떤 국가의 야만에도, 역사의 횡포에도 민중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웅 아닌 영웅들, 이름 없는 영웅들의 서사이다.

우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한 해답을 얻는다. 두 권의 책을 모두 펴낸 눈빛 출판사 이규상 대표의 말처럼 “전쟁에 대한 모든 사진(기록)은 결국 반전(反戰) 사진(기록)”이다. 아니, 반전기록이어야 한다.

눈빛 출판사가 20여년째 이뤄가고 있는 작은 ‘한국전쟁 총서(叢書)’는 전쟁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전쟁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는 증언이다. 그 눈물과 통곡의 증언들은 국가에 대해 국가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도록 하는 추궁이며 국가의 의무에 대한 준열한 요구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포로’와 ‘약속’을 통해 전쟁이라는 집단기억을 국가가 독점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길은 그렇게 그 전쟁을 우리가 온전히 기억하고 기록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종전 6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우리가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는 한국전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바로 송관호, 박도씨, 그리고 눈빛 출판사가 우리에게 열어준 길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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