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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남녀수작을 막는 방법(172)

최종수정 2020.02.12 10:22 기사입력 2014.10.02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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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나이 가는 길을 사나이 에돌듯이
사나이 가는 길을 계집이 치돌듯이
제 사내 제 계집 아니거든 이름 묻지 말구려
정철의 <훈민가> 중에서


'간나이'는 북한 말에 남아있듯이 여자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에도는 것은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멀리 돌아가는 것이고 치도는 것은 아래에서 위로 가는 길을 빙 두르는 것이다. 여자는 아래이니 위에 있는 남자를 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간나이나 사나이에는 하인이나 노복, 기생은 제외다.
남녀간에 사단이 나지 않기 위해선 아예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란 얘기다. 지금으로 봐서는 터무니 없이 가혹한 규제이지만, 조선의 스캔들 단속은 성(性)이 지닌 본질적인 인화성(引火性)을 간파하고 있는데서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대면만 해도 사고치는 놈은 꼭 생기게 마련이다. 거기다가 이름까지 주고받았다면, 이건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큰일이다. 관심(關心)이란 말이, 마음문에 달린 빗장고리를 슬그머니 풀어여는 일이 아니던가.

얼굴도 보지 말고, 이름도 묻지 말아야, 상열(相悅)의 광란상태로 가지 않는다는 저 정철규정집에 의거하자면, 요즘의 거리들은 성을 불지르는데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으며, 각종 술집이나 TV나 영화, 게임 속은 벌써 스스로 슬쩍 미친 채 도발을 유인하는 쪽에 가깝다. 게다가 소개팅이나 회식이니 혹은 엠티니 하는 것들은, 정철이 보면 환장하기 딱 좋을 시추에이션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따위의 '소셜'은 어떤가. 날마다 제 얼굴을 갈아끼우고 밤낮으로 이름을 묻고 팔며 마음을 유통시키는 장소가 아니던가. 저 훈민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천하의 사음(邪淫)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리저리 얽혀들지 않고 무탈하게 지내는 수많이 이들은 얼마나 대단한 '둔감력'을 지닌 분들인가. 욕망의 환경에 너무 단련이 되어, 정철시절의 촉수를 뭉뚱하게 만들어놨음일까.
그런데 말이다. 정철 또한 천하의 풍류남아였고, 구석구석 러브스토리를 남긴 사내이다. 저렇게 훈민가로 일장훈시는 했지만, 조선의 뒷골목에선 지금만큼이나 사련이 들끓고 뒤숭숭한 그리움에 미친 남녀들이 비오는 창에 붙어앉아 밤을 꼴딱 새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저 시조를 읽으면서, 황당해 하지 말고 저 맥락 아래에 숨은 그 세상의 들썩이는 공기를 음미하는 것도 흥미롭지 않은가.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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