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화(發花)의 지점에는 대개 상처가 있다. 나눔에 대해 떠드는 것은, 나누지 않는 삶의 피폐가 참을 수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엔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세상의 주류와 가치로 들어앉으면서 '소유'에 대한 예찬이 극성을 부리게된 전말이 서성거린다. 소유의 차이가 심해지는 것을 우린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부른다. 큰 소유는, 작은 소유를 죽여 그 소유까지 빼앗기 유리한 힘들을 지니고 있는 그 원천적 모순이 작동한 결과이다. 그리고 소유는 서열이 되고 권력이 되며 큰 소유가 작은 소유에게 대개 그 권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다.
그 통증은 MB정부가 들어서면서 대기업 프렌들리를 외치며 돈의 집중을 부추겼던 우리 사회에도 내재해있다. 정부의 노력은 삼성과 현대차, LG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만드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을테지만, 국가 내부에서는 저 부익부의 모순을 더욱 조장하여 중산층을 말살하고 가난한 자들의 삶의 고통을 증대시키는데 한 몫을 해왔다는 진단도 있다.
대선을 치르면서, 여당 후보까지 합세해 경제민주화를 외쳤던 것, 또 박근혜대통령이 재벌의 탐욕과 횡포, 그리고 무절제를 비판하고 중기대통령이라고까지 선언한 배경에는 빈자 국민들의 통증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내부 성찰이 숨어있다. 그 통증에 긴급히 빨간 약이라도 발라주려는 태도가, 나눔으로 전시(展示)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MB도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생과 공생을 외치며 그 터진 갭들을 어떻게 얼버무려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그 권위적 조정이 오히려 부작용들을 만들어낸 이력이 있다. 기업들은 정부의 압박에 눈치를 보면서, 나눔쇼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쇼'도 습관적으로 하다보면 진짜 마음이 되기도 하리라. 그러나 김치를 담가주고 연탄을 날라주는 나눔이,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얼버무림이 더욱 불온한 '모순 유지'의 책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요즘 외국에서는 '접속'이란 말 대신 '공유'라는 개념을 쓰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공유는 접속이 지니고 있던 '비소유' 혹은 '무소유'의 개념을 완화하여, 소유는 하되 여러 사람이 함께 소유함으로 효율과 공동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인듯 하다. 접속은 어떤 빅브라더가 있어서 그 네트워크를 관장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공유는 공유하는 공동체가 민주적으로 그것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이것 또한 소유에서 나눔으로 가는 대이동의 한 정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나눔이란 말은 꽤 의미심장한 이 시대 이 문명의 키워드가 되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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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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