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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우울이란 무엇인가(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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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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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란 마음자리에 눈부시게 낀 안개너울이다. 분간할
수 없는 사물들이 시야의 바깥에서 어른거리고, 눈을 슴
벅거리며 바라보면 차고 눅진한 물기들만 맺혀온다. 잘
디잔 물방울들이 서로 맨살로 껴안으며 소통해야할 먼
곳과 이곳을 가로막고 있다. 우울은 존재를 혼자이게 한
다. 어쩌면 쓸쓸한 삶의 진상을 보여주는 정신의 미장센
인지 모른다. 그 고립을 깊이 확인하는 순간 불안이 몰
려온다. 저 보이지 않는 사방에선 복병(伏兵)들이 전진
해오고 있다. 그의 심장과 눈, 이마, 복부, 등, 어깨죽지
에 창을 겨누고 덤벼들 것이다. 저 보이지 않는 시간이
갑자기 그의 이마를 내려치리라. 쿨럭이며 역류하는 시
간이 그를 부추김질하여 스스로의 앙가슴에 은장도를
꽂게 하리라. 그러나 그는 그 안개 속을 쉬지않고 걸어
간다. 희디흰 맨발은 검은 흙을 내딛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마다 또다른 안개가 그를 휘감는다.
우울은 젖빛 꿈이다.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잠들던 날의
안락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의 변형이다. 그 젖빛시간
과 이 젖빛시간 사이에 낀 삶을 가위질하고 싶다. 그에
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살았던 것들에 대한 단
호한 부정(否定).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세찬 고개흔듬.
우울은 흘러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지우는 지우개이
다. 그 젖빛 공간에 다른 무엇을 채우려는 생각은 없다.
그 공간은 이미 꽉 차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려
는 맹목의 의지에 의해 허공으로 지탱되고 있다.

우울은 자기와의 대화이다. 침묵과 짧은 말들이 긴 시간
을 두고 이어지는 지루하고 내용없는 대화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는, 두 개의
자아가 내뱉는 불연속적인 독백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본 자신은 냉담하고 불쾌한 기색이다. 깊이
응시를 하고 있지만 어쩌면 외면과도 같은 응시이다. 바
라보는 자기와 되쏘아보는 자기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낯설고 어색한 긴장이 그 두 얼굴 사이에 감돈다. 찌푸
린 하늘. 라디오에선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예보한다. 그
소리가 귓전에서 웅웅거린다.

우울이란 정신의 이유없는 몰락이다. 단단하던 지반이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침하한다. 어디까지
내려갈지는 모른다.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이 상황
을 벗어나야할 이유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올 것이 왔
구나 하는 생각이 그의 모든 행동을 붙들고 있다. 무기
력은 신경 올올을 붙들어매는 밧줄과도 같다. 버둥거릴
수록 더욱 단단히 옥죄어진다. 이건 어쩌면 누군가의 오
래된 악의(惡意)인지도 모른다. 버캐처럼 쌓인 분개와
혐오가 작은 입자들로 부서져 그의 정신 속으로 삼투하
였을 것이다. 신경통처럼 생각의 곳곳이 쑤셔온다. 악어
들이 꿈틀거리는 저주받은 늪지 속으로 천천히 들어간
다. 수면 위에 가득 낀 푸른 물풀들을 헤칠 때 뻑뻑한
물살들이 파문도 없이 갈라지며 무거운 몸을 받아들인
다.
우울이란 상실의 그림자이다. 한 존재가 사라진 자리엔
납덩이같이 무거운 그림자가 남는다. 그 그림자는 거칠
게 뒷걸음질치며 그의 정신 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그림
자는 말을 걸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아 납빛 눈물을 떨
어뜨리거나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는 그 그
림자를 위로할 수도 그림자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다. 그
림자는 크고 강력하며 그는 작고 무기력하다. 사랑의 잔
해는 나머지 삶의 수면에 어지러운 부유물(浮游物)들로
남는다. 열망이 깊고 클수록 부유물은 너절하고 삶을 치
명적이게 한다. 우울이란 어쩌면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가장 헌신적인 애도의 형태인지 모른다. 잃어버린 사랑
에 대한 뿌리깊은 죄책감. 자기를 쏴버리고 싶은 분노.
우울은 그를 지배하는 죽은 사랑의 밀정(密偵)이다. 그
는 벌을 받고 있다. 우울은 가학적인 초자아. 너무 엄격
하게 집행된 사랑이다.

우울은 잠못드는 밤의 푸른 공기이다. 콧 속 깊숙히 스
며드는 향기. 그것은 삶의 찬미보다는 죽음의 유혹을 닮
아있다. 모든 사물들은 그의 옆에 드러누워 눈을 감지만
그는 눈을 감을 수 없다. 정체 모를 망념(妄念)들이 그
가 잠들지 못하도록 불침번을 선다. 내가 누구인가? 나
는 왜 사는가? 내가 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
가 살아온 것은 하나의 쓰레기더미가 아닌가? 내가 죽
은 다음의 저 무심과 평화는 지금 내게 어떤 의미를 던
지는가? 그의 몸 속에 들어있던 해골과 뼈대들이 슬금
슬금 몸을 빠져나가 저 홀로 저만치에 선다. 너는 무엇
인가. 해골은 말한다. 나는 너다. 그러나 그는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나일 수 없다. 너는 죽은 다음의 나일 뿐
이다. 그러나 해골은 단호하게 소리친다. 나는 죽음과
상관없이 너에게 존재하는 너의 본질이야. 그는 물건을
빼버린 가죽부대처럼 늘어지며 주저앉는다. 감기지 않는
안구를 굴리며 그는 메마른 지상 위에 비닐봉지처럼 펄
럭인다. 갑자기 기온강하. 엄습한 핵겨울이다.

우울은 뒤늦게 배달된 최고장(催告狀)이다. 배달 일자에
이미 심각한 경고였으나 그것이 뒤늦게 배달됨으로써
어떤 조치를 취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된 상태이다. 그것
은 종종 질병에의 경고이거나 정신에 눌러앉은 종양(腫
瘍)에 대한 진단서이다. 아직 아픈 곳이 없는데? 꾹꾹
몸을 눌러보면 아무런 통증도 없는, 그러나 몸이 바스라
질 것같이 허하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어쩌면 내면에서
깊이 요구해온 것들이 전신(全身)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것은 그 괴로움을
생산하고 있는 자기 몸을 박멸하는 일 밖에 없다는 점
을 깊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울은 정신
의 통증 부위에 긴급히 주사한 마취제이다. 걱정마십시
오. 일은 금방 끝날 것입니다. 그는 회백색 천장을 바라
보며 몽롱해지는 기운을 느끼고 있다.

우울은 가끔 찾아오는 친구이다. 반갑지는 않지만 어김
없이 찾아오는 친구라 기다려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찾아오면 꼼짝없이 삶을 그에게 내줘야 한다. 먹는 즐거
움, 잠자는 즐거움, 섹스하는 즐거움마저 그는 거둬간다.
다만 그와 마주 앉아 그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 가끔 그
는 자살을 권하기도 한다. 삶에서 즐거움을 걷어낸 앙상
함을 보여주며 더 살 만한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압
제에 신음해온 어린 시절과 미친 피의 움직임에 덩달아
뛰던 젊은 시절과 고개를 숙이고 어둑한 굴헝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폐경(閉經)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게 네가
그토록 집착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아
직 은장도를 꺼내는 일을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울은 계절의 이름같은 것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낀
두려움과 낯섬. 삐걱거리는 기분.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
같은 귀에 익은 소리들. 우울은 햇볕 잃은 날들의 퀴퀴
한 내면이다. 그저 이유없이 찾아왔다가 돌연 사라져버
리는 친구. 그러나 우울은 살이보다 더 오래가는 지구
(知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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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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